A Comparison Study of Vijñapti-mātra Buddhism and Bergson’s Unconsciousness: Centered on ‘the Directly Given’ and the Possibility of Experience

Research
안 호영  Hoyoung Ahn1*

Abstract

The discussion of homogeneity and heterogeneity aroused by the consciousness of experiencing matter is itself a history of philosophy. This is in line with the problem of dualism, and the questions that are raised right now are concentrated as “How can we meet if matter and consciousness are so different, and how does it seem to make a lot of difference if not so different?” What makes the question raised more specifically is ‘the materiality of perception(or consciousness)’ or ‘the directly given’, and is a kind of problematic concepts that make this question meaningful.

What was revealed through the discussion is that the spectrum created by these concepts makes the similarity more pronounced than the difference between the ‘vijñãna(識)’ in the context of Vijñapti-mātra buddhism and the ‘consciousness’ in the context of Bergson. For example, we were able to confirm the similarity in the process of discussing how ‘experience’ is possible through ‘the materiality of perception(or consciousness)’ and ‘the directly given’ of ‘vijñãna’ and ‘consciousness’ raised by these two thoughts. It was also found that in the process, it was closely related to the alaya-vijñãna and the unconsciousness of Bergson.

The purpose of this discussion is to invigorate the space that has so far been defined as passive and inactive, from the fact that matter is as conceptual as consciousness and consciousness is as real as matter.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clarify the meaning of ‘the materiality of perception(or consciousness)’. Based on this, it will be possible to reveal the meaning of ‘the directly given’ along with the entire universe. Subsequently, explaining that the alaya-vijñãna of Vijñapti-mātra buddhism can be newly understood in addition to Bergson’s concept of unconsciousness shows that the possibility of experience and the source of existence can be discussed. As a result, our common sense that space is only passive and static will be overturned, and it will be revealed that the space as a whole is a space of creation, with a lively unconscious.

Keyword



Ⅰ. 들어가기

논자는 동·서양 사상의 비교가 차이성에 근거한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유사성에 근거한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고 생산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본 연구는 식(識)과 ‘의식’(consciousness)이 매우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동양 대승불교 사상의 한 축인 유식사상과 20세기 서양 형이상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의 사유를 무의식(unconsciousness) 개념으로 비교할 수 있음을 논구하려는 것이다. 즉, 이 두 사유가 제기하는 식과 ‘의식’ 각각에 ‘직접 주어진 것’을 검토함으로써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하고, 경험 가능성은 아뢰야식 및 베르그손의 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는 연구다. 베르그손의 지각론을 통해 논증된 ‘식의 물질성’이 유식사상에서도 용인됨이 밝혀졌으므로, 즉 물질은 의식만큼이나 관념적인 것이고 의식은 물질만큼 실재적인 것임이 드러난 만큼, 이러한 비교 연구는 두 사상 간의 차이성보다 오히려 유사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미론(極微論)으로 외계를 부정할 때,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식뿐[唯識無境]’이라는 불교적 관념론은 정당화될 수 있었다.1 그러나 외계의 부정은 육근(六根)을 정의할 때 이미 내재된 문제인데, 육식(六識)과 육경(六境)을 매개하는 육근이 식의 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 베르그손의 지각론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안호영은 육근이 물질적[境]이면서도 심적[識]인 것임을 베르그손의 이미지 개념에 의거하여 논증하였다.3 그렇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육근의 의미를 복권할 수 있을 런지는 몰라도, 베르그손의 논의를 통해 경험의 가능 근거이자 존재의 근원인 아뢰야식을 논증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만약 이것을 논증해내지 못한다면, 식의 물질성은 한갓 개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경험의 가능성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로부터 무의식 개념을 논증해내고,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을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이러한 의구심을 잠재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식의 물질성’을 연역해낸 안호영의 논문을 바탕으로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를 밝힌 후, 유식사상의 아뢰야식이 베르그손의 무의식 개념과 더불어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 경험의 가능성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논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먼저 유식사상의 아뢰야식이 어떻게 개념화되었고, 그 구조와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한 몇 가지 논점들을 정리함으로써 ‘직접 주어진 것’과 관련된 ①종자, ②유신근, 그리고 ③기세간의 구조 및 기능을 정리할 수 있다. 이어서 베르그손의 지각론을 통해 물질로부터 순수 기억을 연역해냄으로써, ‘직접 주어진 것’과 관련된 ①기억, ②신체, 그리고 ③물질세계의 구조 및 기능을 정리할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①, ②, ③의 존재성이 연역될 수 있다면, 아뢰야식과 무의식은 오히려 매우 실재적인 것일 수 있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수동적이고 정적인 물질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전복시킨 후, 생동하는 무의식과 더불어 물질은 그 운동성을 회복하고, 아뢰야식은 새롭게 해석될 것이다.4

이러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유식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문헌인 ‘해심밀경’, ‘유식삼십송’ 및 안혜의 주석과 호법의 ‘성유식론’, 그리고 베르그손의 주저인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및 ‘사유와 운동’ 등과 현대 연구자들의 연구물을 재구성하고, 물질과 공간에 대한 상대성이론 및 양자장론 등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성과를 검토한 후, ‘직접 주어진 것’과 경험 가능성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아뢰야식이 베르그손의 무의식 개념과 만날 수 있다는 논증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만남은 ‘직접 주어진 것’과 관련된 세 가지 문제가 해소되어야 논의의 지평에 놓일 수 있는데, 식과 물질의 관계로부터 ①아뢰야식에서 연역하는 ‘직접 주어진 것’ 및 경험의 관념성 문제, ②잠재적 무의식에서 연역하는 ‘직접 주어진 것’ 및 경험의 물질성 문제, ③생동하는 무의식과 운동성을 회복한 물질 문제 등이 그것이다. ①과 ②는 각각 ‘유식삼십송’의 ‘식전변(識轉變)의 사분설(四分說)’과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의 ‘기억의 구조와 작용’ 및 ‘창조적 진화’의 ‘생명 개념’을 정리함으로써 해소된다. 그리고 ③의 결과로부터 식과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따라서 생동하는 무의식과 물질이 만날 수 있음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①과 ②의 결과가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지평위에 놓일 수 있음을 논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③을 통해서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유식즉경(唯識卽境)’을 거쳐 ‘식경불이(識境不二)’로 나아감을 논증한 후, 이를 토대로 운동성을 회복한 물질과 더불어 경험의 가능 조건 및 경험하는 의식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려는 것이다.

Ⅱ. ‘식의 물질성’과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

육체를 통해 안과 밖이 만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가 구체화되어야 한다면, 물질과 공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적 사유에서 공간은 기본적으로 ‘텅 비어있는 공간’과 ‘충만하게 찬 공간’으로 대변된다고 할 때, 이에 따라 ‘직접 주어진 것’과 공간의 관계가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논의에서는 ‘공간화된 시간’과 ‘시간화된 공간’을 대비시킴으로써 전통적인 공간의 의미를 재검토하고, 따라서 생성의 한 축으로서의 공간을 부각시킴으로써 ‘직접 주어진 것’이 ‘식의 물질성’과 만나는 지점이 구체화 될 것이다.

1. 베르그손과 ‘시간화된 공간’

베르그손의 논의에서는 ‘공간’ 특히 기하학적 공간은 지속이 배제된 수학적인 공간이다. 이는 논의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칸트(I. Kant)의 선험적 공간처럼 직관의 형식으로 질이 완전히 배제된 공간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생명체와 그 의식의 진화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복잡계 과학(Complexity theory)의 핵심개념인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는 생성의 문제가 어떻게 수학을 통해 충실히 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참조할 만하다. 즉, 베르그손의 논의에 근거할 때 직관으로만 닿을 수 있는, 그러므로 지속하는 실체인 생명체와 그 의식의 진화 과정을 기하학적 수학에 의지한 지성만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5 최첨단의 과학이 이렇게 관심을 끄는 이유가 우리의 용어나 개념으로 볼 때, “의식에 대한 실마리를 담고 있는 경험 가능한 실험이 ‘직접 주어진 것’이 될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베르그손의 사유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6 우리는 양자장론과 상대성이론으로 대변되는 현대과학이 들추어낸 새로운 공간론의 의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생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허블(E. Hubble)의 계산에 따르면 빅뱅(big-bang) 이후 현재의 우주 모습에 이르는 원뿔형 도식은 시간과 공간을 각각 가로축과 세로축에 배당하는데, 도식적으로만 보면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은 동시적으로 형성된다.7 여러 측면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최초의 에너지에서 시작된 그 원뿔의 내부는 물질과 에너지를 담는 그릇으로 형상화 되는데, 이 그릇은 쉽게 의식으로 또는 기하학으로 은유되는 ‘담는’ 공간 그러므로 ‘상대공간’이다.8 이렇게 은유된 공간에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equivalence principles)를 통해 물질과 시간의 생성을 보여주는 일반상대성이론, 빅뱅의 에너지와 물질과 반물질 등 모든 것을 토해내는 물리학의 무대가 생성과 소멸이 쉼없이 일어나는 장임을 보여주는 양자장론 등은 그 정밀도를 강화시켜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즉, 베르그손의 설명과는 달리 그러나 그의 체험과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는데, 공간도 시간일 뿐만 아니라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와 관련된 검토를 요구한다.9

베르그손도 인정하듯이 생성은 종국에는 미립자들로 분해될지도 모를 물질들의 무한한 상호작용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데, 이미 분할과 분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10 그렇지만 이러한 물질이 공간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기를 요구한다. 즉, 베르그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빅뱅의 과학적 사실에서 출발하더라도 생명과 기억의 문제 그리고 베르그손의 지속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손은 물질을 지속의 이완으로 정의하는 방향을 역전시킨다면, ‘물질과 기억’에서 ‘창조적 진화’로 진행되면서 탈각된 공간의 능동성(positive)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11 그렇다면 빅뱅 이후 그 어떤 요소의 개입 없이 물질에 이러한 능동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며, 이때 공간의 역할을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물질의 형성과 공간의 팽창인데, 이때 물질과 공간이 만나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양자장론이 보여주듯이 공간은 쌍생성과 쌍소멸을 통해 무한의 가능성을 품고 있고, 따라서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잠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간의 역동성을 마주하는 것은 극단적인 실험, 즉 아주 빠른 세계 혹은 아주 작은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의 성과로 확인할 수 있다.12

현대 과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한 것은 특수상대성이 제출하는 ‘쌍둥이 역설’(Twin Paradox)을 통해서다.13 과학적인 측면에서 이 역설은 일반상대성으로 해소되는 것이지만,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숙제를 남기는데, 여전히 “무엇이 또는 누가 움직이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회하지 않고도 이 역설을 해소할 수 있는 한 시도로서 제출된 증명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과 이 우주선을 제외한 우주 전체의 운동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15 이를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이해하려면 사고실험이 필요한데, 움직이는 우주선만 남겨놓은 채로 우주 전체에 있을 모든 것, 심지어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까지도 제거한다면, 그러므로 순수한 공간만 남겨놓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16 사고실험임을 감안하더라도, 우주 전체에 대해 움직이는 우주선임은 불변하는 것이며, 거꾸로 우주 전체가 우주선에 대해 움직여도 상관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 결과가 어떻든 우주 전체와 운동하는 우주선 속의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변하게 된다. ‘시간화된 공간’은 공간의 측면에서 이를 개념화한 것으로 공간과 시간은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을 통해 변환될 것이다.17

이러한 설명은 빅뱅초기에 겪을 급팽창 혹은 인플레이션을 떠올리게 하는데, 빅뱅의 한 점에서 분출하는 초고압 초고온의 에너지와 동시적으로 설정되는 N 차원의 공간 전체가 급격하게 움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이때의 움직임은 무엇에 대한 움직임인지를 묻는 물음과 맞닿는다. 이것을 뉴턴의 양동이 실험으로 검토해보면, 물을 담은 양동이의 크기가 우주 전체만큼 크다면, 이때에도 양동이가 회전할 때 물의 수면 모양을 그렇게 만드는 원심력이 존재할 것인지와 관련된다. 우주의 팽창을 분석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에 대해 멀어지는 즉 상대 운동하는 천체의 관찰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이미 우주 전체만큼 큰 양동이는 그 자체로 우주 전체가 되고 우리는 그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우주 전체만큼 큰 양동이의 회전을 우리가 알 수는 없을 것이다.18

이러한 논의는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회절실험19에서도 등장한다. 드브로이(L. de Broglie)의 물질파로 정식화되었듯이 모든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모두 갖지만, 우리의 지성적 체계는 불연속적이거나 연속적인 것 중의 하나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자의 이중슬릿 회절실험을 통해서 증명되었다. 분명히 전자 입자(particle)를 이중슬릿을 향해 쏘았는데, 이중슬릿을 통과한 전자가 보이는 간섭무늬는 전자 파동(wave)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과는 관찰의 유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사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과 관련해서 굳이 의식이 있는 관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중슬릿을 통과하는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 정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파동을 응축시켜 입자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20 이것과 관련하여 온갖 사고실험이 가능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중슬릿을 통과한 입자의 정보는 이중실험 장치를 제외한 ‘우주 전체가 관측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우주 전체’라는 용어다. 따라서 비교할 수 없는 혹은 정보를 수용할 수 없는 텅 빈 공간만으로 ‘우주 전체’라는 언급은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여행자나 이중슬릿을 통과한 전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상대성이론이 제출하는 ‘시간화된 공간’과 양자장론이 제출하는 ‘쌍생성하고 쌍소멸하는 장(field)’은 결코 비어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창조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역동성을 담지하고 있는 공간임이 드러났음에 주목하자. 이것은 베르그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있는데, 그의 지속 속에 공간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가 어떤 형태의 리듬으로 모두 응축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에서 말하는 ‘직접 주어진 것’의 출발은 우주 전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1

2. ‘식의 물질성’과 ‘직접 주어진 것’

경험한 것과 그 대상을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검토하려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 철학의 역사가 될 것이다. ‘식의 물질성’ 논변에 의거하여 유식사상과 베르그손의 사유를 검토한다면, 경험한 것과 그 대상들이 식이나 물질과 빈틈없이 만나기 위해서는 식이나 물질에 ‘직접 주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물질과 그 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 전체가 우리의 의식 즉 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육근 밖에 있는 혹은 접촉하고 있는 우주 전체를 모두 식 혹은 이미지로 보는 유식사상 및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직접 주어진 것’은 베르그손의 첫 저작 ‘시론’의 제목에 포함된 문구로, 매우 실천적인 개념이면서 근본적인 개념이다. 유가행의 실천가들이 아뢰야식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듯이, 베르그손의 사유는 실재적 시간으로서의 지속을 직접 체험한 것에서 시작하는데, 의식(consciousness)에 ‘직접 주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자의 임무에 충실했던 베르그손도 이 지점에서 유가행의 실천가들처럼 신비적이기도 하다.22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일면적일 수밖에 없는데, ‘물질과 기억’과 ‘창조적 진화’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던 생각들을 면밀히 고찰하고, 그 허구성을 드러낸 다음 진정한 ‘사실의 선(la ligne de fait)’을 따라서 자신의 사유를 정교하게 하는 작업방식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신비주의는 생명을 출현시키는 창조적 노력과의 접촉, 따라서 그것과의 부분적인 일치이다. 그리고 유가행의 실천가들처럼 신비가는 보이지 않는 생명적 힘의 약동에서 비롯하는 정신의 고양된 상태를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논의의 장을 여는 것이므로, ‘직접 주어진 것’을 언어와 개념으로 포착해내지 못한다면, 이 개념은 논의의 지평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사유의 출발점을 인식 대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 그리고 인식하는 우리 의식에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두는 이유이다.

이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베르그손의 논의가 아뢰야식을 연역해 낼 수 있는가에 집중해보자. 이 물음은 ‘식의 물질성’을 연역한 성과를 바탕으로, 아뢰야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즉,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식뿐[唯識無境]’이라는 주장23을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미 안호영도 물질 또는 표상이라 해도 무방한 이미지 개념을 통해 베르그손의 사유는 ‘식(識)의 관념성’과 ‘외계가 실재하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음을 논증했다.24 이렇게 함으로써 ‘인식대상의 외계실재성 및 관념성 문제’25를 ‘지각의 물질성과 의식의 연역 문제’로써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고, 유식사상의 중심 개념인 ‘식의 물질성’ 문제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식의 관념성과 외계실재성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들추어내는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인데, 그것은 경험과 상식에 위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을 물질로 또 물질을 식으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논의는 뇌과학이나 인지과학의 차원에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26

그렇다면 식이 물질이고, 물질이 식이라면, ‘직접 주어진 것’은 어떻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가? ‘물질과 기억’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우리의 경험이 혼합물로 주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사유의 시작점에서 그러한 경험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 혼합물을 가로질러 원리적으로 ‘순수’한 것으로 향하기를 촉구한다. 이때, 우리의 현실적인 의식에 혼합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표상들이 곧 ‘인간적 경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순수 지각 ↔ 지각-이미지 ↔ 기억-이미지 ↔ 순수 기억”의 도식27에서 드러나듯이 ‘순수’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갖는다. 하지만 ‘순수’의 의미는 더 이상 환원되지 않으므로, 두 개의 ‘순수’는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순수 지각과 순수 기억의 ‘구조와 기능’이 어떠하기에 ‘다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논증해야 하는데, 이것은 베르그손이 구체화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베르그손은 이를 논증함으로써 매우 놀라운 주장을 제시한다. 즉, 물질세계와 무의식으로 각각 개념화되는 순수 지각과 순수 기억이 동일한 지평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실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베르그손은 이것을 지속(持續, duré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논의가 유식사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식전변으로 본다면 유식사상의 경험은 몇 개의 식이 작용하여 산출하는 혼합물임이 분명하다.28 따라서 경험의 가능성은 능변식(能變識)인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그리고 요별경식(了別境識) 등과 더불어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검토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대상을 요별하는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은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등의 4번뇌로 물든 욕망하는 주체와 만나서 경험의 혼합물을 만든다. 왜냐하면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을 때, 표층적 분별적 의식 활동의 기저에 있는 심층 근거로서의 욕망이 ‘인간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망하는 주체인 말나식(末那識)은 그 심층에 있는 더 근본적인 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사상을 통해 구체화되었듯이 “전오근 ↔ 제6 의식 ↔ 제7 말나식 ↔ 제8 아뢰야식”의 도식에서 드러난 전오근(前五根)과 아뢰야식은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전오근과 아뢰야식의 ‘구조와 기능’이 어떠하기에 ‘다르지 않을 수’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근(根)은 매우 논쟁적인 개념이지만, 전오근과 경계 사이에 어떤 간극도 없어야 한다. 이로부터 ‘유식무경’과 ‘식일원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식의 물질성’ 및 ‘직접 주어진 것’의 문제는 식 또는 물질의 배후인 순수 지각과 순수 기억의 ‘구조와 기능’ 및 아뢰야식의 ‘기능과 구조’가 어떠한가를 묻는 물음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식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식 또는 물질의 배후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S. Freud), 융(C. Jung), 들뢰즈(G. Deleuze)나 라캉(J. Lacan)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많이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이런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무의식이 과연 실재하는가를 논의해야 한다.

III. 아뢰야식 및 잠재적 무의식과 ‘직접 주어진 것’의 문제

유식불교와 베르그손의 사유에서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를 논구한 후, 이를 통해 구체화되는 세 가지 문제에 집중해보자. 첫 번째는 아뢰야식에서 연역하는 ‘직접 주어진 것’ 및 경험의 관념성 문제이다. 두 번째는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에서 연역하는 ‘직접 주어진 것’ 및 경험의 물질성 문제이다. 이로부터 물질과 순수 기억의 관계를 재조명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동하는 무의식과 운동성을 회복한 물질 문제다. 세 번째 문제는 지각과 기억의 물질성을 통해 설명되는 신체-이미지와 육근(六根)을 비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 아뢰야식과 ‘직접 주어진 것’의 문제

그렇다면 아뢰야식에서 연역해내는 ‘직접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유식사상을 다루는 많은 문헌에서 아뢰야식을 무의식으로 다루고 있음을 수용한다면, 무의식에 해당하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불교의 심식설(心識說)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 시작하는 심식설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삼과설(三果說)로 설명된다. 이를 발전시켜 부파불교는 제6 의식에 의지하여 업력(業力, karma-bala)에 의해 작동하고 유지되는 정신계와 물질계로 나누었지만, 문제는 이 업력의 출처다. 이를 밝히기 위해 육식설(六識說)에 바탕하는 마음작용[心所, citta] 이론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아나 번뇌의 문제뿐만 아니라 번뇌와 관계없는 심층내부의 폭넓은 관조의 힘을 설명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포함하는 팔식설이 ‘해심밀경’의 심식설을 참조하고서야 정식화된다. 또한 숙면상태, 기절 그리고 식물인간이나 뇌사상태 등과 같은 불의의 사고나 극한 상황은 제6 의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문제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29

따라서 말나식[思量識, manas-vijñāna]은 연속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생성 소멸하는 제6 의식과 달리 끊임없이 연속되는 심층심리로 무의식, 심층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늘 살피고 헤아리는’ 것은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으로 가장 강한 ‘본능적 집착’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과거로부터 늘 끊임없이 자세하고 깊이 분명하게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으로, 생사 윤회하는 동안 늘 활동하기 때문에 심층심리/심층의식으로 불린다. 그런데 말나식은 자신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지속적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인데, 미세하고 분별이 없으며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을 대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무의식인 말나식도 아뢰야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 vipāka-vijñāna)이라 불리며,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bīja-vijñāna)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행위의 결과인 종자(bīja)를 저장하는 마음이다.30 본래 아뢰야식은 요가 수행자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경험되고 발견된 마음의 심층에 있는 식이다. 그들은 표층적 의식 활동이나 의지적 집착을 멈춤으로써 의식보다 더 깊은 마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직접 주어진 것’을 확신했다. 즉, 대상으로 현현하는 심층의식은 우리의 일상적 의지인 말나식에 의해 자아로 간주된 식 곧 말나식의 소연인 아뢰야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아뢰야식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식의 ㉠인식론적 측면과 ㉡발생론적 측면에서 고찰을 요구한다. 세친은 ‘유식삼십송’에 인간과 대상계의 존재구조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인간 심식의 발생과정(㉡발생론적 측면)과 존재구조 그리고 개인의 신체를 포함한 현상계의 존재방식(㉠인식론적 측면)을 오직 식의 활동으로 해체시켜서 규명한다. 이로부터 아뢰야식에 ‘직접 주어진 것’으로서의 ①종자와 그 대상인 ②신체(유신근) 그리고 ③기세간(현상계) 등의 인연이 개념화된다.31 따라서 ‘직접 주어진 것’은 아뢰야식의 소연(所緣)이 되는데, ‘유식삼십송’ 제3 게송에서 행상(行相)은 대상을 요별하고, 소연은 대상이며 처(處)와 집수(執受)라고 한다. 이때, 처는 우리가 의지해 사는 처소 즉 기세간을 의미하며, 집수는 우리 자신의 몸 즉 유신근과 여러 종자를 뜻한다. 이 기세간이 바로 우리가 흔히 식 외부에 그 자체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물질세계이다. 그렇지만 아뢰야식에서 연역된 ‘직접 주어진 것’은 경계 없는 식일 뿐[唯識無境]이므로 물질적 경험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으로 대표되는 현대과학의 성과를 수용할 때, 아뢰야식에서 연역된 ‘직접 주어진 것’은 우주 전체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한편으로는 현상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를(㉠인식론적 측면), 다른 한편으로는 심식의 발생과정을(㉡발생론적 측면) 추적할 수 있게 한다.

2. 잠재적 무의식과 ‘직접 주어진 것’의 문제

그렇다면 베르그손의 무의식에서 연역해내는 ‘직접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베르그손은 정신적 존재가 자기 안에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성숙하는데,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베르그손에게 의식이란 물질적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심리-생물학적 의식으로, 이 의식은 생명체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되는 ‘삶에의 주의’를 근본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본능적이거나 습관적인 자동 행위’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표상적 기능이나 지향적 특성’조차도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실천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 베르그손은 무의식이란 이와 같은 의식의 주의 바깥에 비록 실천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비표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심리-생물학적 의식 자체의 발생적 근원이자 의식적 경험의 실재적 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잠재적 실재를 말한다.

잠재적 실재는 베르그손이 물질적 사물로부터 의식을 연역해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채택한 것과 관련이 있다. 첫째, 물질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둘째, 물질적 사물인 생명체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32 이 두 전제로부터 연역된 의식은 지각의 물질성과 맞닿는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이미지라는 주장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즉 지각된 것을 물질이나 표상 또는 의식으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33 따라서 위에서 제기한 두 가지 전제로부터 우리의 지각이 물질적 사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물질과 기억’은 보여준다. 이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심리-생리학적으로 현실화된 부분과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실재 전체의 관계와 같다. 즉, 존재론적 무의식이 심리-생물학적 의식으로 개별화되고 축소되는 과정은 질적 변화의 창조적 시간인 지속이 개입함으로써 잠재적인 다수성(multiplicité)이 현실적인 다수성으로 분화되는 과정이다.34 그러므로 무의식의 의식화, 잠재성의 현실화 과정은 그 자체로 창조적인 지속이며 비결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새로움을 생성하는 운동이다.35

이로부터 무의식이란 의식적으로 표상되지 않고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과거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정의해보자. 왜냐하면,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지나 사라져 가는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예측불가능한 미래로 개방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거는 무엇보다 개별자의 체험된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데, 개인의 정신적 내부에 갇혀 있는 심리학적 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적 의식 자체의 발생적 근원이자 개별자의 체험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존재론적인 무의식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잠재적 무의식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무의식을 ‘물질과 기억’의 순수 기억과 ‘창조적 진화’의 생명 자체를 연결시키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음에 유의하자. 먼저, ‘물질과 기억’은 신체적 조건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 정신을 물질세계와 더불어 논의하며,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존속하고 있는 과거의 총체가 순수 기억으로 정의된 무의식의 존재를 드러낸다.(㉠인식론적 측면) 이때, 순수 기억은 기억된 경험의 현실적인 무용성을 이유로 표상적 의식의 배후에 억제되어 있다가 현재의 실천적 필요에 따라 행동이나 표상으로 현실화된다. 또한, 생명체가 펼쳐내는 삶의 문제는 ‘창조적 진화’에서 다룬다. 이제 의식은 생명과 동연적인 것으로서, 인간 지성을 포함한 의식 일반의 발생적 근거로 작동하는 생명 자체를 근원적 과거로 제시한다.(㉡발생론적 측면) 이때, 생명 자체는 육화된 생명체가 아니라 그 발생적 배후에 존재하는 잠재성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종적 형상뿐만 아니라 그러한 형상들로 분배된 의식 일반의 공통된 발생적 근원이다. 따라서 ‘과거’의 존재 양상과 ①기억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요구하며, 이로부터 ②신체와 ③물질세계, 그리고 이 개념은 지속과 생명 개념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잠재적 무의식에서 연역된 ‘직접 주어진 것’은 베르그손의 이미지 개념으로 경계와 식이 동일한 지평에서 만나므로[唯識卽境],36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구체화되는 ‘공성(空性)’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 번째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지각과 기억의 물질성을 통해 설명되는 신체-이미지와 육근(六根)을 비교할 수 있다.

IV. 생동하는 무의식과 운동성을 회복한 물질

앞에서 논자는 아뢰야식에서 연역된 ‘직접 주어진 것’과 잠재적 무의식에서 연역된 ‘직접 주어진 것’을 경험 가능성의 측면에서 각각 ‘유식무경’과 ‘유식즉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였다. 이제 구체적인 경험과 상식에 근거하여 기억과 무의식의 물질성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먼저, 아뢰야식과 잠재적 무의식에서 연역한 ‘직접 주어진 것’을 비교하는 연구가 어떤 지점에서 경험과 상식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직접 주어진 것’과 경험 가능성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아뢰야식이 베르그손의 무의식 개념과 만날 수 있다는 논증을 정립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육근에 내재된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육근을 비롯하여 육식과 육경을 베르그손의 특권적인 신체-이미지와 비교하는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이로부터 식과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따라서 생동하는 무의식과 물질이 만날 수 있음이 정당화된다.

먼저,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와 경험 가능성의 근거를 논증할 때, ‘종자(種子)·유신근(有身根)·기세간(器世間)’과 ‘기억·신체·물질세계’ 등이 각각 아뢰야식의 종자의 현행화 및 순수 기억의 현실화와 관련됨을 보임으로써 표층의식 밑에 도사리고 있는 심층의식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외경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유식사상이 말하는 아뢰야식을 주장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즉, 아뢰야식의 소연(所緣)으로서 물질을 규정하려고만 하지 말고, 물질에서 시작하여 순수 기억과 생명을 도출할 수 있을 때, 아뢰야식과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 그리고 물질의 의미는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 중심에 물질로서의 생명체와 생명 자체가 맺는 관계가 놓여있다.

따라서 ①(물질 → 아뢰야식), ②(물질 ← 아뢰야식), ③(물질 → 잠재적 무의식), ④(물질 ← 잠재적 무의식)을 구체화하는 논증이 얼마나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물질과 생명 개념에 대한 정교하고 엄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논의가 진행됨으로써 해소된다. 첫째, 베르그손의 물질 및 생명개념을 검토해야 한다. 몇몇 연구자들은 베르그손이 물질을 ‘물질과 기억’과 ‘창조적 진화’에서 부정합적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의혹을 보낸다.37 예컨대, 장켈레비치(V. Jankélévitch)38는 ‘물질과 기억’에서의 물질은 기학학적 공간과 동일시되는 연장이 아니라 정신적 긴장의 가장 낮은 정도에 해당하는 확장으로 정의되는 반면에, ‘창조적 진화’에서 물질은 생명성의 수축과 반대되는 이완으로서 공간의 방향으로 하강하는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한다. 깡길렘(G. Canguilhem)은 물질과 생명의 진화에서 그 차이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39 ‘물질과 기억’에서는 유기화된 개별적인 신체의 물질과 개별적인 의식의 관계인 반면에, ‘창조적 진화’에서는 우주적인 물질과 유기화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보편적인 의식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 고유의 불가분한 연장성과 ‘창조적 진화’에서 물질에 내재하는 공간화의 경향으로 대비된다.

둘째, 유식사상의 생명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아뢰야식40 내의 종자 중 외적 세계인 ‘기세간으로 변현하는 종자’는 ‘모든 유정(有情)들이 함께하는 기세간으로 변현하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공종자(共種子)라고 한다. 반면 유신근으로 변현하는 종자는 유정들에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유정 각각의 신체로 변현하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불공종자(不共種子)라 한다.41 따라서 아뢰야식 내의 불공종자가 내적으로 변현된 것이 각 유정의 유신근이며, 아뢰야식 내의 공종자가 외적으로 변현된 것이 유정들의 공통 의지처가 되는 기세간이다.

셋째, 지각-이미지인 신체의 역할과 육식·육근·육경의 존재론적인 위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외계 실재를 수용하는 육경 및 육근이 어떻게 육식과 만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곧바로 이들의 이중성 문제를 노정시킨다. 물론 이런 논의를 육식에만 한정할 수 없다. 예컨대, 육근은 감각의 근본이면서 동시에 데카르트의 송과선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식불교는 감각 능력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신체란 마음의 변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로 나타나나는 변현의 힘이 바로 마음이고, 그 마음의 변현 결과 즉 힘의 작용 결과가 신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과 몸은 정신과 물질의 두 실체로서 서로 분리되지 않고, 가장 심층의 마음 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신체가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사실 식의 관념성과 물질성 문제는 육식·육근·육경을 정의할 때부터 제기되었어야 할 문제였으며, 베르그손의 지각론은 정확이 이 지점을 공략한다.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 논의로 분명해진 것은 물질과 생명은 이어지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을 정식화하는 개념은 운동을 본성으로 하는 유식불교의 ‘식’과 베르그손의 ‘지속’일 것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아뢰야식과 베르그손의 무의식은 식 또는 의식의 거대한 흐름을 물질에 부과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생동하는 무의식의 발견은 물질의 지위를 변화시킨다. 이제 물질은 수동적이거나 정적인 무엇이 아니며, 우리의 논의를 따를 때 운동성은 물질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순수 기억은 기억-이미지로 현실화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순수 기억은 기억-이미지로, 그리고 지각으로 나아가는 ‘연속적인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물질화’하고 또 이런 방식으로 ‘현실화하면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42 즉, 순수 기억은 단순히 잠재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면서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이처럼 잠재적인 순수 기억이 기억-이미지로 현실화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실재인, 생성의 연속성’43인 것임이 정당화된다.

결국 아뢰야식은 물질만큼 실재적인 것이며, 물질은 잠재적 무의식만큼이 ‘의식’적인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논의는 유식사상과 베르그손의 사유가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지평위에 놓일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또, 베르그손의 무의식으로 아뢰야식을 해석함으로써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유식즉경(唯識卽境)’을 거쳐 ‘식경불이(識境不二)’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운동성을 회복한 물질과 더불어 경험의 가능 조건 및 경험하는 의식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길도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내적으로 강렬하게 경험되는 식과 외적으로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물질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양극단으로서 우리의 삶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식 사상의 ‘유식무경’과 베르그손의 ‘물질세계는 이미지들의 총체다’라는 주장은 각 사상 자체의 내적 완결성은 차치하더라도, 어떤 관점을 선호하는가에 따라서 강점과 약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강점과 약점을 명증한 논증을 통해서 논증해내고 비교함으로써, 식과 물질 그리고 식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것에 어떤 오해와 곡해가 생길 수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V. 나오기

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에 의거할 때, 우리의 논의에서 말하는 ‘직접 주어진 것’의 출발은 우주 전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공간과 더불어 물질세계를 유식불교에서는 전오근으로, 베르그손은 순수지각으로 볼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논의 속에서 무의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접 맞닿는다고 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논의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유식사상의 주장은 ①識에 ‘직접 주어진 것’이 있다; ②경험 가능성의 근거는 아뢰야식이다; ③유신근, 기세간 등은 아뢰야식의 종자의 현행화다. 반면에, 베르그손의 주장은 ①‘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이 있다; ②경험 가능성의 근거는 순수 기억이다; ③신체, 물질세계 등은 순수 기억 또는 잠재적 무의식의 현실화다. 그런데 이 두 주장의 놀라운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은 유식사상의 아뢰야식과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 또는 잠재적 무의식이라는 용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각 사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는 “전오근 ↔ 제6 의식 ↔ 제7 말나식 ↔ 제8 아뢰야식”의 도식 및 “순수 지각 ↔ 지각-이미지 ↔ 기억-이미지 ↔ 순수 기억” 등의 도식에서 보듯이, 물질세계를 대표하는 순수 지각으로 인해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차이점은 우주 전체로 대표되는 공간이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충만하게 찬 공간’임이 드러남으로써, 전오근이 마주하는 물질세계와 순수지각으로 대표되는 물질세계가 서로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세계가 의식의 심층부까지 침투해있다면, 의식되지 않지만 언제든지 의식될 수 있거나,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며 실질적으로 우리 의식이 길어오는 무한한 잠재성으로 있는 세계로 우리가 나아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와 경험 가능성의 근거를 논증할 때, “종자, 유신근, 기세간” 및 “기억, 신체, 물질세계” 등은 각각 아뢰야식의 종자의 현행화 그리고 순수 기억의 현실화와 연결됨으로써 생동하는 우주 전체와 연결된다. 이로부터 생동하는 우주 전체는 가능한 경험의 총체로서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을 포괄하고 있는 만큼, 표층의식 밑에 도사리고 있는 심층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주 전체가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식(識) 또는 경(境)이라 해도 무방하며, 경이라는 용어를 인정하더라도 유식사상이 말하는 아뢰야식을 주장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즉, 아뢰야식의 소연(所緣)으로서 물질을 규정하려고만 하지 말고, 물질에서 시작하여 순수 기억과 생명을 도출할 수 있는 만큼, 아뢰야식과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 그리고 물질의 의미를 새로운 지평에서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물질만큼 실재적인 것이며, 물질은 잠재적 무의식만큼이 ‘의식’적인 것임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장론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우주 전체’라는 용어다. 즉, 상대성이론이 제출하는 ‘시간화된 공간’과 양자장론이 제출하는 ‘쌍생성하고 쌍소멸하는 장(field)’은 결코 비어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든지 창조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역동성을 담지하고 있는 공간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처럼 풍부할 수 있는 공간을 언어와 기호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순전히 규정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 더욱이 역동성을 담지하는 공간으로 체험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데, 여전히 ‘반성하는 시선’ 혹은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즉, 우주 전체를 ‘반성하는 시선’ 혹은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우주 전체가 거주하지만, 그 시선 자체는 거주할 수 없다는 러셀의 역설(Russel’s Paradox)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베르그손의 사유가 빛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는 이러한 난점을 ‘창조’ 혹은 ‘새로움의 출현’이 본성인 지속을 통해 해소하는데, 지속과 별개의 것이 아닌 ‘생의 약동(élan vital)’을 통한 도약이 곧 ‘창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소가 지시하는 바는 분명한데, 어떤 ‘시선’도 지속을 넘어설 수 없으며, 따라서 지속이외에 어떤 것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식불교의 입장은 어떠한가?

논의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러한 물음은 두 사상 간의 유사성만큼이나 차이성도 부각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논자는 이 물음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절대공간’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생명체’와 ‘생명’ 개념을 ‘바라보는 시선’의 지평에 올려놓는다는 것으로부터 두 사상 간의 차이가 구체화되고, ‘절대공간’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절대공간’이란 ‘바라보는 시선’에만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직 은유적으로만 제시되는 공간으로, ‘시선과 그 대상’이라는 이분법적인 접근을 넘어서는 문제와 맞닿는다. ‘생명체’와 ‘생명’이 갖는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역동성을 담지하는 공간은 생명체를 품지만, 이것에서 생명을 포착하는 것은 무엇인가?” 베르그손의 논의를 따를 때, 생명은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므로 생명을 포착하는 것 역시 생명일 수밖에 없다. 즉,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성적 분석을 포함하는 공감(sympathy)이지만,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직관(intuition)이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직관은 지속의 장자(長者)로서 지속에 공감하는 것인데, 베르그손의 논의는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유식불교는 한 걸음 더 내딛어 공성(空性) 혹은 유식성(唯識性)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베르그손의 사유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베르그손의 사유 속에서 이러한 유식성 혹은 공성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논의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44

요약

물질을 경험하는 의식이 불러일으키는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 철학의 역사다. 이것은 이원론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데, 당장에 제기되는 물음들은 “물질과 의식이 그토록 다르다면 어떻게 만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다르지 않다면 어찌 이리 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가?”로 모아진다. 제기된 물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은 ‘식의 물질성’이나 ‘직접 주어진 것’ 등으로, 이러한 물음을 의미 있게 하는 일종의 문제적 개념들이다.

논의를 통해 드러난 것은, 이러한 개념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은 유식불교의 문맥에서 말하는 ‘식’(識)과 베르그손의 문맥에서 말하는 ‘의식’(consciousness)에 대해 차이성보다는 유사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두 사유가 제기하는 ‘식’과 ‘의식’을 ‘식의 물질성’ 및 ‘직접 주어진 것’ 등을 통해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논하는 과정에서 그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아뢰야식 및 베르그손의 무의식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졌다.

본 논의의 목적은 물질이 의식만큼이나 관념적이고 의식이 물질만큼 실재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지금까지 수동적이고 비활성적이라 규정되었던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 넣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식의 물질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바탕으로 우주 전체와 함께 ‘직접 주어진 것’의 의미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이 베르그손의 무의식 개념과 더불어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은, 경험의 가능성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논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공간은 수동적이고 정적일 뿐이라는 우리의 상식은 전복되고, 생동하는 무의식과 더불어 우주 전체인 공간은 창조의 공간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주제어 : 아뢰야식, 지속, 지각, 베르그송, 무의식

Footnotes

미주

1 따라서 우리의 논의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QM)과 상대성이론(General Relativity Theory, GRT) 등으로 대변되는 물리학이 보여준 혁명적 발견들을 조회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인간 지성의 엄청난 성공인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베르그손은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개념적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잇따르는 과학적 발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이 등장하기 전에 시작된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펼쳐질 과학의 가장 핵심적 주장들과 맞붙기 때문이다.

2 大乘五蘊論(1卷), 世親菩薩造, 玄奘譯, 大正藏 제1권 No. 1612.(T31: 850c24.).

3 안호영(2018), 122쪽.

4 유식불교의 전개를 짧은 지면 속에서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본 논의는 후기유식의 관점에 해당하는 유상유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밝혀둔다.(유식불교의 전개와 관련해서 김묘주(‘유식사상’(서울: 경서원, 1997) 및 한자경(‘唯識無境 -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카르마총서5, 서울: 예문서원, 2000)의 논의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이와 더불어 “유식의 식과 베르그손의 무의식”에 대한 논의를 “초기유식의 관점에서 아타나식의 공능과 훈습의 기제 그리고 No-mind로서 무, 공 또는 유식의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유식불교를 넘어 불교전체 속에서 베르그손을 검토하려는 논자의 의지와 맞닿는다. 논문의 내용이 더욱 명료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도와준 익명의 심사자에게 감사드린다.

5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한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도 기하학적 공간 속에서 그 만큼의 자유를 갖는 수학기호를 통해 우리 우주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전역학의 적자일 뿐만 아니라 유클리드(Euclid)와 비유클리드(non-Euclid) 기하학을 그대로 상속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누구에게나 과학의 영웅인 그 만큼의 해석들로 이야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단한 수학만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양자장론으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은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사실들을 놀라운 정밀도로 설명하고 있는 뛰어난 지성조차도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수학적 엄정성을 갖춘 이론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파동-입자 이중성(particle-wave duality),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나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 이중슬릿(double slits experiment), 얽힘(entanglement)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측정이나 관찰자의 개입 혹은 정보 인식 주체 등의 문제를 계속 생산해내고 있다.

6 물론 과학과 연속적인 형이상학을 꿈꿔온 베르그손의 기대와 달리, 과학적 성과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의 사유가 성공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논의를 국한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최소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과학을 이해하는데 마주할 어려움과 당대의 과학을 조회한 베르그손의 사유에 배어있는 시대적 한계들을 모두 들추어냄으로써,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실마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7 스티븐 호킹, 현정준 옮김, ‘시간의 역사’, (서울: 삼성출판사, 1990), 70-72, 80-82쪽.

8 여기서 말하는 ‘상대’는 모든 움직이는 것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 척도 개념을 뜻하는 뉴턴의 ‘절대’도 포함한다. 과학에서 말하는 ‘절대’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는데, 이미 무엇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포함하는 무엇’과 ‘포함되는 무엇’은 이런 관계에 의해 상대적이라는 의미로 묶인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구체화되겠지만, ‘절대’는 ‘상대’에 대한 상대개념, 즉 ‘상대’라는 용어를 떠올릴 때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절대’라는 의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9 이것은 ‘창조적 진화’를 통해 구체화된 “우주는 지속한다.”라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명제가 (形而下學)의 최전선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특권적인 위치를 점하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의 지속이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우주의 지속과 맞닿기 때문이다.

10 앙리 베르그손, 황수영 옮김, ‘창조적 진화’(서울: 아카넷, 2005), 30-31쪽, 534쪽.

11 앙리 베르그송, 이광래 옮김, ‘사유와 운동’(서울: 문예출판사, 1993), 52-53쪽. 실증과학(la science positive)이 결코 실재에 대한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는 베르그손 형이상학의 방향과 일치한다.

12 공간론 및 양자장론에 대한 논의는 로렌스 크라우스(‘無로부터의 우주’, 박병철 옮김, 서울: 승산, 2013) 및 닐 투록(‘우리 안의 우주’, 이강환 옮김, 서울: 시공사, 2013)를 참조하시오.

13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 우주선을 타고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을 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지구에 머물러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1년 동안의 우주여행 후 이 두 쌍둥이가 지구에서 다시 만났을 때, 누가 더 나이를 많이 먹었는가? 즉, 상대운동임을 감안할 때, 누가 과연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운동을 했는가와 관련된 역설이다.

14 쌍둥이가 만나서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되돌아오는 가속운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등속도운동을 설명하는 특수상대성이론보다는 가속도운동을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요청되는 것이다.

15 뉴턴(I. Newton)의 양동이 실험은 물을 담은 양동이의 회전과 관련된 사고실험이다. 양동이가 회전을 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동이에 담긴 물도 함께 회전하면서, 양동이 벽 쪽으로 밀리며 움푹한 모양이 된다. 이 경우 양동이와 물은 서로에 대해서 정지해있는데, 사실 물을 담은 양동이가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정지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상황이 다르다면, 회전하는 양동이는 무엇에 대해 운동하고 있는지를 묻는 사고실험이다. 뉴턴은 어떤 절대공간에 대한 양동이의 회전운동이며, 이것은 ‘원심력’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마흐(E. Mach)는 물을 둘러싼 우주의 다른 물질과의 상호작용 때문에 물의 수면 모양이 바뀌었다고 말했는데, 이것을 ‘마흐의 원리’라고 부른다. 조금 더 극적으로 물을 담은 양동이만 있는 우주 공간을 상상할 때, 양동이와 물은 우주 공간 전체에 대해 상대 운동한다는 것이다.

16 사실 이 공간은 무엇인가를 채워놓은 후에 그것을 비운다는 생각을 따라서 형성된 것이다. 포함하고 포함된다는 이러한 은유가 목표하는 바는 물질을 비운 공간만을 남긴다는 것인데, 실제로 남는 것은 그러한 생각뿐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서서히 ‘절대’에 다가가게 된다.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는 베르그손의 ‘시간의 공간화’ 개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용어적인 측면만 본다면, ‘시간화된 공간’도 여전히 시간을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볼 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서 제기된 문제는 상대론적 양자장론을 통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18 그렇다면 회전하는 양동이의 크기가 점점 커져서, 결국 우주크기와 일치할 때에도 원심력이 존재하겠는가? 즉, 원심력은 회전력이 정지한 관성계에 대해서 나타나는 관성력이므로, 이러한 관성계가 사라졌을 때에도 회전력이 사라졌는가? 예를 들어 우주 속의 수많은 나선은하들은 우주를 기준으로 회전하지만 우주 자체는 무엇에 대해 회전하는가? 물론 우리 우주를 품는 더 큰 우주를 상정할 수 있지만, 그 만큼 큰 양동이를 상상할 수 있는 사고실험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러한 물음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물음인 동시에 과학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19 안호영, 「인성교육과 나를 일깨우는 과학, 과학을 통한 시간성의 체험」(교양교육학회, ‘교양교육연구’ 8, 2014), 365쪽. 1801년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보여준 영(T. Young)의 실험으로 가로막에 서로 인접한 가늘고 긴 틈(slit) 두 개를 만들고 이 틈으로 빛을 통과시켜서 반대편의 흰 벽에 비칠 때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파동인 빛 대신에 입자인 전자로 똑같은 실험을 한다면 간섭무늬를 관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전자에 대해서도 빛과 완전히 똑같은 실험결과가 나왔다. 전자는 어떻게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전자를 파동과 연결 짓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파동은 현실에서 보는 그런 파동이 아니라, 수학의 형식으로 나타난 파동이다. 다시 말해서 수면파니 음파니 하는 예들은 전자를 설명하는 것에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파동형식을 형식화한 한 사람은 슈뢰딩거(E. Schrödinger)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로 주어지는 추상적인 수학적 파동은 관찰되고 있는 순간도 포함해서 전 시간에 걸친 전자의 상태를 기술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전자 하나를 실제로 관측 또는 측정하게 되면, 이 파동 함수는 마법처럼 전자가 실제로 나타나는 공간의 한 특정한 점으로 붕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중슬릿에 전자를 하나씩 쏘는 실험에서도 간섭무늬를 관측했다. 전자의 자기 간섭무늬는 전자 하나만 쏠 때도 그것이 자기 자신과 간섭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면파의 비유를 떠올린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면파로 진행하던 수면파는 두 개의 슬릿을 만나기 전까지는 같은 위상을 가진 파동이었다 전자가 탐지되기 전까지는 파동처럼 행동하고 탐지된 뒤부터는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이 이상한 성질은 양자론의 주요 문제인데, 이것을 ‘측정 문제’라고 한다. 측정의 문제는 양자역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이 문제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보성의 원리(관찰자가 양자적 대상에 대해 완전히 알려면 두 가지 보완적인 성질을 한꺼번에 알아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성질은 서로 정합적이지 않아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변수를 알면 다른 변수가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의미이다.)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답이 매우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20 ‘창조적 진화’를 허용하는 공간은 더 이상 기학적 공간일 수는 없으며, 이것이 베르그손과 아인슈타인의 대립하는 곳이기도 하다.

21 안호영, 「체험된 직접성, 최제우의 시(侍)와 베르그송의 직관(直觀)」, 동학학보, ‘동학학회’ 제29집, 2013, 304쪽

22 Bergson, Melanges, p.766.

23 ‘轉識論’, 世親菩薩造, 眞諦譯, 大正藏 제1권 No. 1586.(T31: 61c15-19); E. Conze, Buddhist Thought in India(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7), p.251ff.

24 안호영(2018), 109쪽.

25 Schmithausen, Lamber, On the Problem of the External World in the Ch’ng wei shih lun(Tokyo: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2005), p.9; 안성두, 「유식(vijñaptimātra)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 비판」(철학사상, Vol. 61, 2016), 4쪽.

26 맥스웰 베넷, 피터 마이클, 스티븐 해커, 이을상 외 옮김, ‘신경과학의 철학 - 신경과학의 철학적 문제와 분석’(서울: 사이언스북스, 2013), 577쪽; 안호영, 「종교, 교육은 가능한가?-뇌과학과 선불교를 중심으로’, 한국종교교육학회, ‘종교교육학연구’, 55집, 2017, 56-61쪽.

27 앙리 베르그손, 박종원 옮김, ‘물질과 기억’(서울: ,아카넷, 2005), 229쪽.

28 ‘唯識三十頌’의 제1, 2게송.

29 김묘주(1997), 157쪽.

30 현장 한역, ‘해심밀경’(서대원 옮김, 서울: 시공사, 2001)(‘解深密經’, T16: 292b). 중국에서 음사하여 阿賴耶, 阿梨耶, 阿羅耶 등으로 한역된다. 의역하여 현장(玄奘)은 藏識, 宅識으로, 眞諦는 無沒識로 번역한다. 그런데 종파에 따라 달리 번역되는데, 지론종 계통에서는 淸淨識, 법상종과 섭론종 계통에서는 妄識으로 본다.

31 한자경(2000), 136쪽.

32 ‘물질과 기억’, 2005, 71쪽.

33 ‘물질과 기억’, 2005, 37; 45쪽.

34 잠재적인 무의식과 현실적인 의식의 관계는 스피노자(B. Spinoza)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를, 또는 셀링(F. Shelling)의 절대적 동일자의 변증법적 자기관계를 연상시킨다.

35 ‘창조적 진화’, 2005, 447-448쪽

36 안호영(2018), 142쪽.

37 김재희,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대와 철학’ 19호, 2008), 15-16쪽.

38 Jankélévitch, V., Henri Bergson, Paris: P.U.F. 1959, p.70.

39 Canguilhem, G., “Commentaire au troisiéme chaptire de L’evolution créatrice”(Bulletin de la Faculte des lettres de Strabourg, avril-juin, 1943), p.200.

40 김묘주(1997), 216쪽.

41 한자경(2000), 130쪽.

42 ‘물질과 기억’, 2005, 234쪽.

43 ‘물질과 기억’, 2005, 231쪽.

44 결과적으로 우리의 논의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절대공간’이고, 생명은 ‘절대공간’을 마주하는 능력으로 정의될 것이며, 따라서 베르그손을 통해 입자적 혹은 기계적으로 조립된 생명체가 자신 속에서 ‘절대공간’을 발견하는 노력이 곧 생명임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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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唯識二十論(1卷), 世親菩薩造, 玄奘譯, 大正藏 제1권 No. 1590.  

10 成唯識論(10卷), 護法等菩薩造, 玄奘譯, 大正藏 제1권 N0. 1585.  

11 轉識論(1卷), 世親菩薩造, 眞諦譯, 大正藏 제1권 No. 1586.  

12 大乘五蘊論(1卷), 世親菩薩造, 玄奘譯, 大正藏 제1권 No.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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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묘주, ‘유식사상’, 서울: 경서원, 1997.  

23 김성관, 「유식(唯識)과 무의식에서 본 열린정신: 아뢰야식과 집단무의식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인문핚연구소, ‘열린정신인문학연구소’, 9집, 2호, 2008.  

24 김재희,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대와 철학’ 19호, 2008.  

25 남수영, 「알라야식설과 무의식설의 비교 고찰: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을 중심으로」, 인도철학회, ‘인도철학’, 5권, 1995.  

26 닐 투록, 이강환 옮김, ‘우리 안의 우주’, 서울: 시공사, 2013.  

27 로렌스 크라우스, 박병철 옮김, ‘無로부터의 우주’, 서울: 승산, 2013.  

28 맥스웰 베넷, 피터 마이클, 스티븐 해커, 이을상외 옮김, ‘신경과학의 철학 - 신경과학의 철학적 문제와 분석,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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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안성두, 「유식(vijñaptimātra)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 비판」,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사상’, Vol. 61, 2016.  

33 안호영, 「양자역학 태동기의 이원론에 관한 역사적 연구 : 베르그송, 드브로이, 하이젠베르크」, 부산대학교인문학연구소, ‘코키토’ 70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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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안호영, 「종교, 교육은 가능한가?-뇌과학과 선불교를 중심으로」, 한국종교교육학회, ‘종교교육학연구’, 55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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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조현수, ‘물질과 기억’ 1장에서 펼쳐진 <의식의 연역>과 그 의미: “물질세계는 이미지들의 총체다”라는 주장은 어떻게 입증되는가?」, 철학연구회, ‘철학연구’ 97호, 2012.  

40 한자경, 「후설 현상학의 선험적 주관성과 불교 유식철학의 아뢰야식 비교」, 한국현상학회, ‘철학과 현상학 연구’ 24-1, 1996.  

41 한자경, 「‘절대의 마음’에 대한 동서사유의 비교 ─유식과 여래장사상 그리고 칸트와 독일관념론을 중심으로」, 불교학연구회, ‘불교학연구’ 30, 2011.  

42 한자경, ‘唯識無境 -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카르마총서5, 서울: 예문서원, 2000.  

43 현장 한역, 서대원 옮김, ‘해심밀경’, 서울; 시공사, 2001.  

44 Jankélévitch, V., Henri Bergson, Paris: P.U.F., 1959.  

45 Canguilhem, G., “Commentaire au troisiéme chaptire de L’evolution créatrice”, Bulletin de la Faculte des lettres de Strabourg, avril-juin, 1943.  

46 Conze, E, Buddhist Thought in India.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67.  

47 Schmithausen, Lamber, On the Problem of the External World in the Ch’ng wei shih lun. Tokyo: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2005.  

48 Worms, Frédéric, Introduction à Matière et mémoire de Bergson : Suivie d’une brève introduction aux autres livres de Bergson, Collection «Les grands livres de la philosoph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