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gument about Silla tea of Jiuhuashan(九華山) Kim Jijang(金地藏)

Research
장 성재  Sungjae Jang1*

Abstract

As for whether the tea that Kim Jijang took to the Jiuhuashan was Shilla tea(新羅茶), we looked at old Chinese literature respectively. The results are as follow. In old Chinese literature, there were two opinions that the tea what Kim Jijang took to the Jiuhuashan was the tea from Western China(西域) or Silla. As a result of the investigation, not only the origin of the rice(‘黃粒稻’) seed, but also the origin of the pine nut(‘五釵松’) seed was “Shilla,” not “Western China”. Therefor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origin of the Green tea(‘金地茶’) seed is also Shilla. Therefore, it is possible that Kim Jijang obtained tea seeds from Shilla and took them.

Keyword



Ⅰ. 문제 제기

중국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 ‘구화산(九華山)’은 본래 ‘구자산(九子山)’이었으나, 당대에 ‘시선(詩仙)’으로 이름난 이백(李白, 701-762)의 시1로 인해 ‘구화산’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2

이처럼 구화산은 이백을 비롯한 이름난 문인들이 탐방해서 그 감상을 자신들의 시에 담았고, 그중에는 아예 구화산에 은거해 살면서 이곳 자연과 함께한 인물들도 있었다. 대표적 인물로서 송말원초의 진암(陳岩, 1240-1299)은 구화산 곳곳을 다니면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자신의 시를 담아 개인 시문집인 『구화시집(九華詩集)』을 남겼다. 이 책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함께 수록한 이야기들 또한 구화산 관련 자료로서 매우 중시되고 있다.3 그리고 1526년(명대 가정5)에 이런 개별기록들을 종합 편찬한 구화산의 대표문헌으로, 최근까지도 수정 보완을 거듭해 오고 있는 『구화산지(九華山志)』가 있다.4

우리가 구화산에 대한 이 기록들을 더욱 주목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신라 구법승으로 평생을 마친 김지장(金地藏, 696-794)5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에게 김교각(金喬覺)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김지장은 신라 왕족으로서 당에 건너가 구화산에 입산하여 평생 수행한 결과, 사후 육신이 썩지 않은 이적을 나타낸 인물이다. 이런 까닭에 김지장은 중국인들에게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로 추앙되었고, 그의 이적으로 인해 구화산도 명나라 때 이미 ‘중국사대불교명산(中國四大佛敎名山)’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6

그러나 이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김지장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도 자신의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아서 그의 행적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김지장의 생애와 관련된 가장 신뢰할 만한 문헌 기록은 비관경(費冠卿)7의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成寺記, 이하 『化城寺記』)』8이다. 김지장 사후 19년(813년, 唐 元和8 癸巳)이 지나서 쓴 이 글은 비관경이 어릴 때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기술9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김지장 연구에 있어서 대부분 이를 주요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글도 내용의 초점이 화성사 사찰창건과 관련하여 김지장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어서, 그의 전모를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후대의 기록이지만 『구화시집』이나 『구화산지』 등에는 『화성사기』가 다루지 않은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김지장에 대한 정보를 보완해 주거나 새로운 내용으로까지 확장시켜 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날까지 논란되고 있는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차 종자를 ‘신라 차’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10 ‘차’와 관련된 김지장의 행적은 『화성사기』에도 없는 내용으로, 이를 처음 제시한 기록은 진암의 『구화시집』이다.11 이 시집 말미에 구화산의 <물산(物産)>과 관련해서 ‘금지차’를 소개하였다. 여기서 진암은 김지장이 ‘금지차(金地茶)’를 비롯한 세 가지 종자를 구화산에 가져왔고, 금지차의 원산지가 ‘서역(西域)’임을 밝히고 있다.12 그러나 1593년(명대 만력21)의 『구화산지』에서는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온 세 가지 종자를 소개하면서, 진암이 ‘금지차’의 원산지를 ‘서역’이라 한 것은 잘못이라 보고, ‘신라(新羅)’로 수정하였다.13 이후 중국에서는 통상 구화산의 대표 문헌인 『구화산지』의 견해에 따라, 금지차의 원산지를 ‘신라’로 소개해 오고 있다.

한편 한국 문헌 중 신라 차나무 존재를 명시한 최초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난다. 828년(興德王 3) 대렴(大廉, 연대미상)이 중국 차 종자를 가져와 흥덕왕의 명에 따라 지리산에 심었다는 것14인데, 김지장의 생존연대(696-794)보다 뒤의 일이다. 따라서 『구화산지』의 기록을 따르면, 신라 차나무의 존재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최소 100년이나 시기적으로 앞서게 된다. 다만 『구화시집』의 금지차 원산지가 ‘서역’이란 견해는 당시 전해오는 이야기(‘相傳’)에 근거를 둔 것에 반해, 『구화산지』는 ‘서역’이란 견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신라’로 수정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부담 때문인지 1938년(민국27)에 발간된 『구화산지』에서는 금지차를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온 것이라 기술하면서도, 신라가 원산지라는 내용은 제외하였다.15 이처럼 한‧중의 문헌 자료들 모두 김지장의 신라 차 존재에 대해 보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음에 따라, 오늘날까지도 김지장이 중국에 가져간 ‘신라 차’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김지장의 ‘금지차’에 대한 문제는 단지 김지장 개인인물의 해명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828년 이전 신라 차나무의 존재문제와 함께 당시의 차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신라 차의 존재문제를 주제로 한 본격적인 연구가 없었던 것은 관련 문헌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가, 김지장의 차 종자를 매개로 한 논증의 시도조차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의 목표는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금지차를 ‘신라 차’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려는 데 있다. 이때 방법론적 검토과정에서 ‘필연성’이 아닌 ‘개연성’을 제시한 이유는 앞서 밝힌 것처럼 김지장과 신라 차에 대한 자료들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16 따라서 현재까지 발굴된 단편적 자료들을 서로 연결해서 추리해 보면, 비록 ‘개연성’이라 할지라도 ‘신라 차’ 문제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은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한국문헌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중국문헌에 소개된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차’의 원산지에 대한 ‘서역’과 ‘신라’ 두 주장의 근거를 비교해 보겠다. 이때 설득력 있는 가설정립을 위해 김지장이 ‘금지차’와 함께 가져간 ‘오채송’과 ‘황립도’, 이 세 가지 종자들의 특징과 그 관계에 대해 주목해봄으로써, ‘금지차’가 ‘신라 차’일 가능성을 타진해 보겠다. 아울러 연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검증된 문헌 자료의 기록에 의거하되 근거 없는 설화적 내용은 배제하겠다.17

Ⅱ. 중국 구화산 ‘금지 차’원산지 문제

‘금지차’란 이름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송말원초의 진암(陳岩, 1240-1299)이다. 그는 송나라 멸망 이후 나라 잃은 슬픔에 구화산에 은거하여 이곳 경관들을 두루 유람하면서, 그 장소들과 관련된 사연을 시와 함께 적어 『구화시집』을 엮었다. 진암은 이 책 말미에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온 <물산> 3가지 중 ‘황립도’를 제외한 ‘오채송’과 ‘금지차’의 원산지를 ‘서역’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구화산의 대표 문헌인 『구화산지』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이들 모두 ‘신라’로 수정하였다. 이 단원에서는 ‘금지차’라는 명칭과 함께 원산지에 대한 두 주장의 근거를 비교한 뒤, 원산지 검토와 세 종자들의 관계를 통해 금지차를 ‘신라 차’로 볼 수 있는 ‘가설 정립 가능성’을 검토해 보겠다.

1. ‘금지차’ 명칭과 관련 장소

진암이 『구화시집』에서 ‘금지차(金地茶)’라 이름한 것은 김지장의 시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18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는 김지장이 산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동자를 배웅하며 느낀 감회를 쓴 것이다. ‘금지차’는 이 시 4구 “황금땅(‘金地’)에서 금모래(‘金沙’) 모으기 게을렀지(懶於金地聚金沙).”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다. 이 내용은 동자가 ‘금지(金地. 진리 도량)’인 산사에서 금모래(‘金沙’) 모으듯 열심히 정진하지 않고 한눈팔더니, 결국 절집 생활에 적응 못하고 하산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동자가 산사에서 한눈팔던 구체적 사례는 다음 5구와 6구에 보인다. 5구 “계곡물 바닥에 병 담가, 비친 달 불러오길 그만두고(添甁澗底休招月)”는 동자가 물을 길을 때 물 위에 비친 달그림자를 병 안에 담는 장난을 묘사하였다. 6구 “달이는 차 사발 속 거품꽃 희롱하길 멈추었네(烹茗甌中罷弄花).” 또한 차를 달일 때 일어나는 거품들을 가지고 장난치며 한눈파는 동자의 모습을 그렸다. 동자가 산사에서 행한 물 긷고 차 끓이는 두 사례 모두 김지장의 음차 생활과 관련된 내용이다. 따라서 4구의 ‘금지’가 김지장이 기거한 산사를 뜻하고 5구와 6구의 내용은 ‘차’와 관련된 글이기에, 이 시의 내용에 근거해서 김지장이 가져온 차의 명칭을 ‘금지차’라 이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를 쓸 당시, ‘금지’로 표현된 김지장이 기거한 산사의 위치는 그가 말년에 기거했던 ‘남대(南臺. 지금의 月身寶殿)’로 추정된다. 『화성사기』를 보면 김지장이 85세가 넘은 말년(’中歲’)에 화성사에서 ‘남대(南臺)’로 거처를 옮겨 ‘시자 한 명(一從者)’을 데리고 생활한 것으로 기록19했는데, 이때 ‘시자’는 <송동자하산>에 나오는 ‘동자’와 관련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지장 사후 남대에 세워진 ‘지장탑(地藏塔)’ 앞에 그의 시 4구에 표현된 ‘금사(金沙)’와 똑같은 용어로 ‘금사천(金沙泉)’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 아래 샘물이 있다.20 이 샘은 김지장과 동시대 인물인 시선 이백(李白, 701-762)이 먹을 씻은 장소로도 전해져 온다.21 그러나 송말원초의 인물인 진암의 『구화시집』에는 ‘금사천’이란 이름은 있지만 그 위치가 남대와 떨어진 다른 장소22로서, 김지장이나 이백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금사천’ 석각과 이백의 설화는 – 진암이 구화산에 은둔했던 원대 초기 이후에 – 김지장이 남대에서 시를 쓴 것이란 확신을 주기 위해, 이백의 권위를 빌어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23 분명히 ‘금지차’ 명칭은 시 <송동자하산>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시가 김지장 말년에 남대에서 쓰였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남대의 ‘금사천’ 존재를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진암이 전한 ‘금지차’란 명칭을 검토하면서 알게 된, 더욱 중요한 사실은 김지장의 시 존재확인과 그의 음차 생활에 대한 더욱 확실한 근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진암이 이 시를 염두에 두고 ‘금지차’라 이름한 것이라면, 시 <송동자하산>이 『전당시』에 기록된 청대보다 앞선 원대 초기에 이미 김지장이 이 시의 작가로 알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청대 기록에 나타난 시 <송동자하산>이 김지장의 것일 가능성이 더욱 확실해 졌기 때문이다.24 둘째로 이 시가 김지장의 것이 확실하다는 전제에서, 이 시의 내용을 통해 김지장이 음차 생활을 중시했음도 확인된다. 김지장이 구화산에 금지차를 가져왔다는 것은 곧 입산 전부터 음차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금지차가 ‘신라 차’라고 한다면, 이는 김지장이 신라에서부터 음차 생활을 했을 ‘가능성’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다. 김지장이 신라에서도 마시지 않았던 ‘신라 차’의 종자를 구해서, 차 문화의 발생지이자 명품 차들이 즐비한 중국에 가져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에서 이에 대한 전제가 될 ‘금지차’의 원산지에 대해 살펴보자.

2. ‘금지차’의 원산지 문제

진암의 개인시집인 『구화시집』은 구화산 곳곳을 방문하면서 각각의 장소에 담긴 사연들을 소개하고, 그곳에서 느낀 감상을 시로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장소들과 관련된 <명승(名勝)>을 소개하고 시를 읊은 저술내용에서, 부록처럼 시집 말미에 구화산의 <물산(物產)> 세 가지를 첨부해서 소개하였다. 이것이 곧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왔다는 황립도(黃粒稻)와 금지차(金地茶), 그리고 오채송(五釵松)의 종자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진암은 신라의 ‘황립도’를 제외하고 ‘금지차’와 ‘오채송’의 원산지를 서역이라 했는데, 특히 금지차의 경우는 ‘전해 오는 말(相傳)’에 의거하고 있다.25 김지장이 ‘서역’에서 왔다는 기록은 다른 주요문헌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데, 어떤 이유로 『구화시집』에서는 이를 ‘전해 오는 말’로 근거 삼을 수 있었는지 추리해 보자.

첫째로 서역 지역과 김지장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살펴볼 기록으로 1269년 송대에 편찬한 『불조통기(佛祖統紀)』26가 있다. 『불조통기』에는 756년(至德 元年) 안록산의 난으로 사천 지역의 성도(成都)로 피신한 당 현종이 국운과 강토를 회복하기 위해 대성자사(大聖慈寺)를 건립하고, ‘신라 승 전선사(全禪師)’에게 규제(規制)를 세워 96곳의 사원과 8,500구역을 다스리라는 칙령을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27 그런데 이 기록에서 “전선사는 뒤에 지주 구화산(池州 九華山)에 가서,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坐逝). 몸 전체가 썩지 않았고(不壞), 뼈들은 쇠사슬(金鎖) 같았다. 수명은 99세였다.”28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기록의 내용이 훗날 구화산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 또 그 지역이 ‘서촉(西蜀)’이지만, 중국 서쪽지역을 통칭하는 의미로 ‘서역’이라 불렀거나 그 장소가 와전된 것이라면 – 구화산에서 사후 이적을 보인 ‘김지장’을 사천 지역의 ‘성도’에서 온 ‘신라 승 전선사(全禪師)’로 오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원대 초 진암의 『구화시집』도 당시 사람들 말에 근거해서, 김지장이 ‘서역’에서 왔다고 볼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서역과 금지차 원산지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중국 서쪽 밖의 ‘서역’은 기후나 지리적 조건이 차의 생산지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중국차를 수입하는 소비지역이다.29 이에 반해 ‘서촉’의 ‘성도’가 있는 사천지역은 ‘차의 고향’이란 이름처럼, 당시 매우 번창하던 차 문화의 발상지이다. 이곳에서 당나라 때 최고의 차이자 최초의 공차(貢茶)로 황실에 진상된 ‘몽산 몽정차(蒙山 蒙頂茶)’30를 비롯한 유명한 차들이 생산되고 소비되었다. 따라서 훗날 구화산 사람들이 ‘금지차’의 원산지를 ‘서역’이라 한 것은 『불조통기』의 기록에 의거해서, 당 현종을 만난 김지장이 차로 유명한 서촉(西蜀)의 성도(成都)에서 명품의 차 종자를 가져왔다는 믿음과 관련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김지장이 사천지역의 성도에 가서 당 현종을 만났다는 『불조통기』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송고승전』에서 "때마침 당 현종(‘明皇’)이 난을 피해서 ‘촉(蜀)’에 들어갔을 때, ‘무상(無相, 684-762)’을 내전에 들여서 공양하고 예경하였다."31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전선사’는 김지장이 아닌 ‘무상’32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33 무상과 김지장은 동시대에 신라에서 입당해 홀로 두타행(頭陀行)을 수행해서 이름을 빛낸 구법승이다. 두 사람은 ‘김씨(金씨를 全씨로 착각)’ 성을 가진 신라 왕족의 신분으로서 진골계급이었기에, 후대 중국인들이 동일 인물로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착오된 기록을 근거로 해서 『구화시집』이 ‘금지차’를 ‘서역’의 것으로 보았다면, 그 주장의 설득력도 그만큼 약화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진암의 ‘서역’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진암은 자신의 『구화시집』에서 ‘서역’과 ‘신라’ 두 지역을 함께 제시하는 모순도 범하고 있다. 『구화시집』 첫머리 <화성사> 글에서, “당나라 건중 중기, 김지장이 (화성사에) 머무는 것을 동의했다(‘依止’). 禪의 무리들이 평지의 밭 수천 ‘무(畝)’ 넓이에 황립도(黄粒稻)를 심었다. 밭 위쪽에 차를 심은 것이 다른 곳과 달라서, ‘명지원(茗地源)’이라 불렀다. 정자 뒤로 오채송(五釵松)이 있는데, 열매 맺은 것이 향기롭고 맛있다. 모두 신라에서 옮겨와 심은 것이다.”34라고 하였다. 진암은 이 글에서 근거 제시 없이, 세 가지 종자 모두 ‘신라에서 옮겨와 심은 것(皆自新羅移植)’이라 하였는데, 진암이 이를 의식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시집 서두와 말미에 모순된 두 견해를 동시에 기록하게 되었다.

이에『구화산지』의 편집자들도 『구화시집』 앞뒤의 모순된 글을 쉽게 찾아냈을 것이기에, 세 가지 종자의 원산지를 기록할 때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1593년(명대 萬曆21) 『구화산지』에서는 진암의 기록을 수록하되 ‘서역’에 대한 기록은 잘못이라 지적하고, 대신 『구화시집』의 <화성사> 기록처럼 세 가지 종자 모두 원산지를 ‘신라’로 수정하였다.35 그런데 문제는 『구화산지』 또한 원산지에 대해 ‘서역’을 부정하고 ‘신라’로 수정한 근거를 글 속에 명백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부담 때문인지, 이후 1938년(민국27) 발간한 『구화산지』는 아예 원산지에 대한 내용을 제외시켜 버렸다.36 그렇다면 과연 ‘금지차’ 원산지가 ‘서역’이 아닌, ‘신라’로 보는 것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다음 단원에서 김지장이 가져간 세 가지 종자의 특징과 관계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Ⅲ. 세 가지 종자의 관계로 본 ‘신라 차’ 존재 가능성

앞서 언급했듯이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것은 ‘금지차’의 차씨 외에도, ‘황립도’라는 볍씨와 ‘오채송’이라는 솔씨가 있었다.37 다양한 식물들이 분포된 구화산에 들어가면서, 김지장은 유독 이들 세 가지 종자를 가져간 이유를 생각해 보자. 나아가 이 세 가지 종자의 특징과 관계를 통해, 금지차를 신라 차로 볼 수 있는지도 추리해 보도록 하자.

1. ‘황립도’ 종자

『구화시집』은 전해오는 말(‘舊傳’)에 의거해, 김지장이 신라에서 황립도 종자를 가져왔다고 하였다.38 『구화산지』에서도 “황립도는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휴대해서 가져온 씨앗이라 전해 온다(‘舊傳’). 이삭 끝이 뾰족하고, 두터운 낟알, 색이 짙고 향기롭고 부드러워, 다른 볍씨와 다르다(與凡稻異).”39고 하여, 중국의 볍씨와 구별되는 황립도의 특징들을 자세히 묘사하였다.40 이 두 문헌 기록 모두 ‘전해오는 말(舊傳)’에 의거해서, 황립도가 신라의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나타난 황립도의 ‘두터운 낟알’이란 특징은 당시 중국 강남지역 구화산의 인디카 종과는 다른, 신라의 자포니카 종이 지닌 ‘형태가 짧고 둥근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황립도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기록을 통해, 김지장은 신라에서 볍씨를 가져갔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김지장이 구화산에서 수행과 교화 활동을 기록한 『화성사기』와 관련해 볼 때, 바로 이 신라의 황립도 볍씨를 재배해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41 그가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오랜 기간 홀로 수행 생활을 하다 지역주민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솥 안에 약간의 쌀밥과 백토가 들어 있었다. 그가 오랜 기간 외부의 시주에 의지하지 않고 수행하려면, 직접 작물을 경작해서 자급자족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주민들이 김지장을 모시고 화성사를 재건했을 때도 김지장과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은 저수지인 ‘방생지(放生池)’와 논을 조성42하여, 함께 일해서 수확한 쌀로 자급자족하며 생활하였다.43

이때의 상황을 앞서 『구화시집』에서 제시한 세 가지 종자 모두 ‘신라에서 옮겨와 심은 것(皆自新羅移植)’이란 내용44과 관련해 추정해 보면, 김지장은 신라에서 가져온 황립도 종자를 벼농사에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수확한 쌀은 먼저 불전에 올린 후, 수행자들과 음식공양을 함께 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명나라 신종(神宗, 재위 1573-1620) 때의 인물인 이지세(李之世, 연대미상)의 시에서 “금율(金粟 즉 황립도)은 원래 불공 올리는 양식(佛糧)이다. 스님이 말하길 다른 나라(殊方)로부터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산새도 흘린 낟알 감히 입에 물지 못하니, 향발(香缽 공양구)에 먼저 받들어 부처님께 공양한다.”45라는 글을 통해 추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금율’로 표현한 황립도는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즉 신라에서 가져온 벼이고, 수확한 것은 먼저 불전에 올리는 귀한 공양물임을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이 시를 쓴 이지세가 명대 인물임을 생각해 보면, 김지장이 가져온 ‘황립도’는 당대 이후로도 귀한 작물로 여겨져 계속 확대 경작해 감으로써 화성사만이 아닌 구화산 주변 주민들의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황립도는 김지장과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이 진리를 구함에 체력을 유지시켜 주는 바탕이 되었고, 이후로는 구화산 주변 사람들 식생활까지도 큰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2. ‘오채송’ 종자

‘오채송’의 원산지 문제와 관련해서, 그 대상지역인 서역과 신라를 관련시켜, 『구화산지』에서 제시한 명칭과 특징을 『해동역사(海東繹史)』46의 기록과 비교하여 검토해 보겠다. 첫째, ‘오채송’ 잎의 특징과 관련해서, 『구화산지』에서는 “소송(蘇頌, 1020-1101)이 … 중략 … 이것을 오채송(五釵松)이라 한 것은 ‘채(釵비녀)’가 본래 두 갈래(雙股)이고 ‘송(松 소나무)’의 잎도 모두 둘이기에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나무에 다섯 잎이 있는 것이 마치 ‘채(釵비녀)’에 다섯 가닥이 있는 것과 같아서, 이로 인해 이름이 ‘오채송’이라 할 뿐이다.”47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긴 설명은 곧 ‘오채송’의 명칭이 다섯 잎의 외형적 특징에서 비롯됐음을 뜻한다.48 이와 비교해서『해동역사』도 ‘해송자(海松子)’에 대해 “신라 오립송(五粒松)은 한 떨기에 다섯 개의 잎이 돋아나는데, ‘채(釵비녀)’와 같이 생겼다.”49고 『사성본초(四聲本草)』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구화산지』에서의 ‘오채송’ 명칭에 대한 해설이 『해동역사』에 기록된 신라 ‘해송자’의 외형적 특징인 다섯 잎의 ‘오립송’과 동일한 내용이다.

둘째, ‘오채송’ 열매의 특징과 관련해서, 『구화산지』에서는 “솔씨는 작은 밤의 삼각형 모양에 그 속살은 향기롭고 맛이 좋으니, 곧 오립송(五粒松)의 열매이다.”50라고 하였다. 이 설명 또한 『해동역사』에서 『대관본초(大觀本草)』의 글을 인용하여 “해송자는 신라에서 생산한다. 작은 밤처럼 삼각형 모양이다. 그 안의 속살은 향기롭고 맛이 있다.”51라고 한 글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처럼 『구화산지』에서의 ‘오채송’에 대한 명칭과 특징은 『해동역사』에 소개된 신라 ‘해송자’에 대한 설명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구화산지』에서 비록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서역’의 견해를 부정하고 ‘신라’로 수정한 것은 옳은 판단이라 하겠다.

이렇게 중국 문헌에서 ‘오채송’이라 호칭한 신라 ‘해송자’는 한국에서는 ‘소나무’보다 ‘잣나무’로 알려져 있다. ‘잣나무’는 잎이 소나무처럼 두 갈래가 아닌 다섯 갈래이면서, 그 열매의 형태와 속살에 대한 특징 또한 식용의 ‘잣’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화시집』이나 『구화산지』등 중국 구화산 관련 문헌에서 오채송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신라’ 잣나무로 인식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 특히 강남에서는 신라 잣나무의 형태와 열매가 생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채송’ 잣나무의 특징이 중국의 것과 차이가 있는 만큼, 구화산에서의 성장환경 또한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구화시집』에서 김지장 당시 오채송의 종자를 화성사 주변에 황립도와 금지차를 재배할 때 함께 심은 것으로 소개했는데, 이와 아울러 김지장이 말년에 기거한 남대에도 이 오채송을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화시집』의 <오채송> 해설(‘原注’)에서 “오직 탑사(墖寺) 앞에만 오채송이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한 그루 나무가 말라 죽을 때마다 옆에서 한 그루 작은 나무가 뚫고 나온다.”52고 하였다. ‘남대’는 김지장 사후 이적에 따라 ‘탑사(현 육신보전)’를 건립한 곳이다. 진암이 이를 보고 쓴 글이어서, 원대까지도 이곳에 오채송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명대 『구화산지』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현재는 신라의 잣나무 ‘오채송’이 이곳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53

3. 세 가지 종자와 그 관계

이상 김지장이 휴대한 세 종류의 종자를 소개한 중국의 구화산 관련 두 문헌의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금지차’의 원산지를 ‘서역’이라 주장한 『구화시집』이 근거한 당시 사람들의 말은 『불조통기』에서 ‘무상’을 ‘김지장’으로 오인한 기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시집 서두에 세 가지 종자 모두를 ‘신라’의 것으로 본 모순된 기록조차 있었다. 또한 후대 『구화산지』에서도 근거 제시는 없으나 ‘서역’을 부정하고 세 가지 종자 모두 ‘신라’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금지차의 원산지를 ‘서역’이라 한 주장의 신뢰성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이에 반해 두 문헌 공히 신라의 것으로 인정한 ‘황립도’ 뿐만 아니라, 서역의 것이라 주장했던 ‘오채송’마저 그 잎과 열매의 특징에 의해 신라의 명품 잣으로 판명되었다. 특히 신라 잣나무로 판명된 ‘오채송’의 경우 – 『구화시집』과 『구화산지』 두 문헌 모두 그것이 지닌 외형적 특징들만 상세하게 열거했을 뿐, 그 존재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함에 따라 – 오늘날까지도 그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해동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오채송’의 정체가 신라 잣인 ‘해송자’로 판명되었다는 것은 곧 김지장이 신라에서 종자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입증해주는 보다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다.

이처럼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세 가지 종자의 원산지를 검토해본 결과, ‘금지차’는 서역의 것이라 보기 어려워졌고, 서역의 것이라 한 ‘오채송’은 도리어 신라의 것으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자포니카 종의 ‘황립도’ 볍씨와 함께 ‘오채송’ 잣씨도 신라의 것이라면, ‘금지차’의 원산지 또한 – 두 문헌에 기록된 서역과 신라 두 지역 중 – 서역보다 신라일 가능성이 높기에, 금지차가 ‘신라 차’라는 가설을 정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세 가지 종자가 모두 신라의 것이라면, 김지장이 입당할 때 이것들만을 선별해서 가져가려 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세 가지 종자의 공통점은 관상용이 아닌 식용작물이라는 점에서, 김지장은 이것들을 재배해서 먹고 마시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물을 확보하려 한 의도로 보인다. ‘황립도’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주식이자 그 자체로 완전식품이다. 실제로 구화산 마을주민들이 김지장을 동굴(‘石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솥 안에 백토가 섞인 약간의 밥이 있었다는 것에서 쌀이 그의 주식으로 사용됐음은 분명하다. 아울러 ‘오채송’ 또한 “동이(東夷)사람들은 이것을 항상 과일로 먹는데, 중국 땅의 ‘송자(松子)’와는 다르다.”54고 한 기록을 생각하면, 김지장은 수행할 때의 식용으로 중국 땅에 없는 ‘신라 잣’을 준비했을 것이다. 게다가 신라의 잣은 해외로 수출하는 유명한 특산품이었기에, 선물용으로도 활용 가능했을 것이다. 『해동역사』에는 『청이록(淸異錄)』의 글을 인용해서 “신라의 사신들이 매번 와서, 많은 값을 받고 ‘송자’를 준다. 여러 등급이 있는데 … 중략 … ‘옥각향’이 가장 뛰어나서, 사신들 역시 자기들도 이를 진귀하게 여긴다.”55고 하였다. 이처럼 신라 잣이 중국에서도 귀하게 취급받았다면, 김지장은 식품용도 외에 방문지역의 선물용까지도 염두에 두고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두 가지 종자를 준비한 이유가 있었다면, ‘금지차’ 또한 식음료 이상의 용도가 고려되었을 것이다. ‘차’는 육우(陸羽, 733-804)의 『다경(茶經)56』에서 보듯이 “『본초(本草)』 木部에 ‘명(茗)’은 쓴 차(苦茶)이다. … 중략 … 사람이 잠을 적게 자도록 한다”57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김지장이 입당 전 신라에서 이런 ‘차엽(茶葉)’의 졸음 쫓는 효능을 알았다면, 쓴맛에 상관없이 수행정진을 위해 ‘차’를 애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인 1123년(인종 1년) 중국 송의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 1091-1153)’의 기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 차에 대해 “토산차(土産茶) 맛은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어,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 차를 귀하게 여긴다.”58고 하였다. 이런 ‘쓴 맛’의 차가 고려시대 토종 차의 특징이라면, 신라시대 또한 이런 ‘쓴 맛’은 신라 차의 특징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지장은 차의 선별기준을 중국의 명차와 같은 차의 ‘품질’을 위주로 하지 않고, 수행목적에 적합한 차의 ‘효능’을 위주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김지장은 – 중국에 입당하면 신라에 비해 좋은 차들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 그동안 수행정진하는 가운데 경험상 졸음을 쫓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쓴맛의 신라 차(‘금지차’) 종자를 구해서 가져간 것이라 판단된다.

중국 당대 풍속을 기록한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59는 차 마시는 것(飲茶)과 관련해서 “『본초(本草)』에서는 갈증을 멈추게 하고, 잠들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 중략 … 개원(開元) 중기 태산 영암사 항마선사(降魔師)가 선종의 가르침(禪教)을 크게 일으키자, 선을 배움에 잠자지 않고, 또 저녁도 먹지 않고 힘쓰는데, 모두 차 마시는 것에 의존했다. 사람들 스스로 차를 품거나 끼고서, 가는 곳마다 마셨다. 이를 좇아 서로 옮겨가며 모방하자, 점차 풍속이 되었다.”60고 하였다. 이 글에서 개원(開元) 중기는 김지장이 입당하는 전후 시기61로 보이는데, 이 당시 중국에서는 불교사원에서 선 수행을 중심으로, 정신을 각성시키고 시장기를 면해주는 음차문화가 대중들에게도 유행되어 풍속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당대 차 문화의 유행은 신라에도 전해졌을 것이고, 김지장도 이런 소식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수행 생활에 활용했을 것이다.62

종합해 보면 이 세 가지 신라의 토종 종자는 김지장이 입당해서 ‘구법’수행에 필요한 생명유지와 수행증진에 꼭 필요한 기본 음식재료로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김지장이 신라에서 수행할 때부터 중시한 식품들로 추정되며, 이 종자들은 중국에 휴대해 갈 때 다른 짐들보다 부피나 무게에 있어서 훨씬 간편하고 가벼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 종자들은 장기간 보관도 가능하기 때문에 정착하는 장소에 심어 기르면, 어떤 물품을 가져가는 것보다 낯선 타지에서 적응하고 수행에 집중는데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63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지장의 차 종자가 ‘신라’에서 가져간 것은 더욱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문헌에서는 김지장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데다가, 828년 이전에는 차나무 관련 기록도 명시돼 있지 않아서, 김지장의 입당 전 시기에 과연 신라에 차나무가 존재했는지 ‘입증’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김지장의 금지차 원산지를 ‘서역’이 아닌 ‘신라’로 봐야 한다는 이 ‘가설’을 근거로, 김지장 당시 신라의 차나무 존재 가능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이에 대한 연구를 더 진행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 이 가설을 통해 828년 전후 한국 차 문화 연구가 한층 더 진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Ⅳ. 맺음말

김지장의 ‘신라 차 종자’ 기록과 관련된 여러 문헌과 증거를 토대로, 한국 차나무 최초기록인 828년보다 이른 시기에 신라에 차나무가 존재 했을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김지장에 대해 기록된 중국문헌들을 검토하여 신라 차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고 ‘신라 차’가설을 세우고자 하였다.

‘가설’정립을 위해, 먼저 김지장이 가져온 세 가지 종자 중 ‘금지차’란 이름을 처음 소개한 진암의 『구화시집』과 구화산의 대표문헌인 『구화산지』 기록을 대조해 보았다. 원대 초기의 『구화시집』은 금지차 원산지를 ‘서역’이라 보았는데, 그 근거는 당시 ‘전해 오는 말(相傳)’에 있었다. 이에 대해 명대의 『구화산지』는 그 원산지로 ‘서역’은 오류이고 ‘신라’가 옳다고 수정하였으나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그 후로도 ‘금지차’ 원산지 문제는 명쾌하게 해명되지 못하였다.

이 문제 해명을 위해, 먼저 ‘금지차’ 원산지를 ‘서역’으로 본 『구화시집』이 근거로 삼은 ‘전해 오는 말’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사천지역 성도에서 활약한 ‘무상(無相)’을 김지장과 동일 인물로 착각한 『불조통기』의 잘못된 기록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울러 『구화시집』은 글 서두에서 세 가지 종자를 ‘신라’의 것으로 본 모순도 함께 범하고 있어서 ‘서역’에 대한 주장은 그만큼 설득력이 약해졌다 하겠다. 그리고 세 가지 종자 중 금지차와 함께 원산지를 ‘서역’이라 본 ‘오채송’을 『해동역사』의 기록과 비교해 본 결과, 신라 잣나무인 ‘해송자’로 밝혀졌다. 이로써 김지장이 신라에서 종자들을 가져갔다는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아울러 ‘금지차’를 서역의 것이라 보기 어려워진 반면에, ‘황립도’와 함께 ‘오채송’도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근거로 금지차의 원산지를 두 문헌이 주장한 ‘서역’과 ‘신라’중에서 ‘신라’일 가능성이 훨씬 높기에, 이 글에서는 금지차 원산지가 ‘신라’라는 가설을 주장하고자 한다.64

요약

이 글은 김지장(金地藏, 696-794)이 중국 구화산에 가져간 차 종자를 신라 차로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한국문헌에는 관련기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중국문헌에 소개된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차’의 원산지에 대한 ‘서역’과 ‘신라’ 두 견해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차씨(‘金地茶’)의 원산지가 ‘서역’이란 주장의 근거는 잘못된 것이고, 김지장이 가져간 볍씨(‘黃粒稻’)와 함께 잣씨(‘五釵松’)도 그 원산지가 ‘서역’이 아닌 ‘신라’임을 새롭게 입증하였다. 이런 이유로 ‘금지차’의 원산지 또한 ‘서역’보다 ‘신라’일 가능성이 높기에, 금지차가 ‘신라 차’종자라는 주장을 하나의 ‘가설’로서 제시하였다. 이로써 김지장이 입당할 때, 신라에서 차씨를 구해 갔을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이 가설에 근거해 본다면, 김지장의 입당 시 신라 차 종자 휴대기록은 『삼국사기』에 최초로 나타난 828년 대렴의 차 종자 도입 기록보다 앞선 것이 된다. 따라서 이 ‘가설’과 관련해서, 당시 한국 차 문화 기록에 대한 보다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겠다.

주제어

김지장, 구화산, 신라 차, 서역, 신라, 황립도, 오채송, 금지차

Endnote

1 이백은 <구자산을 구화산으로 개칭하는 연작시(改九子山爲九華山聯句)>라는 제목으로, “묘함이 있어 두 기운을 나누더니, 신령스런 산은 아홉 송이 꽃(‘九華’)으로 피었구나(妙有分二氣 靈山開九華).”라고 읊었다. 아울러 시 <구화산을 바라보며 청양현령 위중감에게 보내다(望九華贈靑陽韋仲堪)>에서는 “지난날 구강(九江) 위에서, 멀리 구화봉(‘九華峰’) 바라보았더니, 은하수 푸른 물 매달아, 아홉 송이 연꽃(九芙蓉) 솟아 나왔다네(昔在九江上 遙望九華峰 天河掛綠水 秀出九芙蓉).”라는 구절로, 아홉 봉우리가 마치 연꽃 핀 형상 같다는 구화산의 특징을 표현했다(이백의 시는 『(修訂本)九華山志』, 黃山書社, 1990, p.287, pp.306-7 참조).

2『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成寺記)』 첫머리에 “구화산은 옛날에 구자산이라 불렀다(九華山古號九子山).”고 하였고,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도 김지장을 소개하면서 “그 산은 천보(天寶, 742-756)중에 이백이 이곳을 유람하면서 구화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其山 天寶中 李白遊此號爲九華焉).”라고 밝히고 있다(『宋高僧傳』 卷20, 唐池州九華山化城寺地藏傳 참조).

3 진암의 『구화시집』은 1781년(乾隆46) 청대 건륭제의 칙령으로 황실의 장서를 4부(經・史・子・集)로 분류 정리한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의 集部에도 포함되어 있다(『文淵閣四庫全書』 1189冊 集部128 別集類 참조).

4『구화산지』는 그동안 실전된 기록들을 제외하더라도, 명대 1526년(嘉靖5)에 6권으로 편집되었고, 1579년(萬曆7)에 중수한 것을 1593년(萬曆21)에 다시 8권으로 중집해서, 1629년(崇禎2) 중수했다. 청대에는 1652년(順治9)에 12권으로 중수한 것을 1689년(康熙28)과 1716년(康熙55), 1739년(乾隆4), 1901년(光緖27) 12권으로 중수하고, 민국시대인 1938년(民國27)에 8권으로 중수하였다. 또 최근에는 현대적 관점의 정보를 담은 『(수정본)구화산지』 1권도 1990년에 편찬하였다(『(修訂本)九華山志』 附錄 5, 書目輯存, 黃山書社, 1990, pp.551-2 참조). 이 글에서 『구화산지』를 인용할 때는 대체로 전통적 서술방식의 1938년(民國27) 『구화산지』를 참고하겠고, 따로 이를 표기하지 않겠다. 다만 1990년에 출간된 『구화산지』는 근현대 기록내용들을 많이 첨부해서 구성형식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기에, 이 책을 인용할 때는 『(修訂本)九華山志』로 표기하겠다.

5 한국 측 문헌에는 김지장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를 696년-794년으로 본 것은 중국 당대 비관경(費冠卿)의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成寺記)』에 ‘정원(貞元)10년’에 세상을 떠난 기록에 근거한다. 이에 비해 『송고승전(宋高僧傳)』은 비관경의 글을 대부분 참고 인용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같은 견해이지만, 사망 연도는 이보다 9년 후인 ‘정원19년(803년)’으로 보고 있다(『宋高僧傳』 卷20, 唐池州九華山化城寺地藏傳 참조). 오늘날 김지장의 기록과 관련해서 대부분 비관경의 견해를 따르기 때문에, 본 글 또한 이를 기준으로 삼겠다.

6 명대에 구화산(九華山)은 이미 오대(五臺)‧아미(峨眉)‧보타산(普陀山) 등과 함께 ‘중국4대 불교명산(中國佛敎四大名山)’으로 일컬어졌다.(『(修訂本)九華山志』 3篇1, 沿革, 黃山書社, 1990, p.94 참조).

7 비관경은 청양(靑陽)사람으로, 당 헌종 때인 807년(元和2)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모친상에 묘를 지키다가 구화산 소미봉(少微峰)에 은거하였다. 그 후 벼슬을 추천받았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全唐文』卷694 참조).

8 『全唐文』 卷694에 비관경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九華山化成寺記(이하 『化城寺記』)』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9 『化城寺記』 “時元和癸巳歲 予閒居山下 幼所聞見 謹而錄之.”

10 이 기록은 『화성사기』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김지장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에 역수출한 ‘신라 차’ 존재문제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중국에서는 이미 원대와 명대에 ‘신라 차’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였는데, 한국에서는 근래에 와서야 이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1 淸代 康熙帝 때 당시(唐詩) 전체에서 선별한 900권의 『御定全唐詩』 卷808에 ‘김지장’ 이름의 시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 시를 김지장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지장 생존 시기로부터 오랜 세월이 경과되어 그 진위여부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12『구화시집』 말미에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온 ‘물산(物産)’으로, 진암은 전해오는 이야기(‘相傳’)에 근거해서, ‘금지차’는 김지장이 ‘서역’에서 가져온 것이라 밝히고 있다(『九華詩集』 物産 金地茶. “出九華山 相傳金者地藏 自西域擕至者”).

13『(明 萬曆 蔡立身 修)九華山志』 卷3에 “地藏自西域(誤. 應爲新羅)携來.”라 하여, 김지장이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마땅히 ‘신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修訂本)九華山志』附 : 金地茶, 黃山書社, 1990, p.549 참조).

14『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10 興德王3年조. “入唐迴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徳王時有之 至於此盛焉.”

15 1938년(民國27)에 발간된 『九華山志』 卷8에서는 金地茶와 관련해서 “相傳金地藏攜來種.”라고 하여, 금지차의 원산지에 대한 기록 없이,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온 사실만을 기록하였다.

16 이 글의 형식을 연역논증(‘필연성’)이 아닌, 귀납논증(‘개연성’)으로 ‘가능성’을 살펴보려는 것은 자료의 부족 외에도, 귀납논증의 특징인 새로운 가설(‘김지장 당시의 신라 차나무 존재’)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과 개별적 사실(‘김지장의 차씨’)에서 전체(‘신라 차나무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17 중국 구화산의 김지장 설화들 중 근거 없이 전해진 이야기나 유람 중에 들은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비록 옛 문헌의 글이라도 그 의미를 검토해 볼 수는 있어도 검증된 자료와 동일하게 취급하지는 않겠다.

18 시 <송동자하산>은 淸代 康熙帝 때 당시(唐詩) 전체에서 2,200여 명의 작가와 48,900여 수의 시를 선별해 전체 900권으로 이루어진 『全唐詩』(본래 명칭 『御定全唐詩』)의 卷808에 ‘김지장’의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그의 생애에 대해 “신라국 왕자로서 至德 初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에 머물렀으며, 시 한 수가 있다(新羅國王子 至德初航海 居九華山 詩一首).”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19『화성사기』에서 “中歲領一從者 居于南臺.”라고 한 대목은 김지장의 나이 85세가 넘은 780년경(建中 初) 화성사가 공인된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中歲’라는 표현은 ‘중년’의 나이가 아닌, ‘농사에서 한 해 수확을 거둬들인다(<百度百科> 참고)’는 의미의 삶을 정리하는 ‘말년’의 나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20『구화산지』에는 “金沙泉有二. 一在地藏塔前 石刻金沙泉三字. 一在無相寺南(『九華山志』 卷2 形勝門2. 泉, 金沙泉).”이라 하여, 지장탑 앞과 무상사 남쪽의 두 곳 금사천을 지적하였다. 그 중 지장탑 앞 금사천은 현재는 탑 위에 육신보전을 세웠기에, 그 건물 뒤편 아래로 내려가면 ‘상선당(上禪堂)’ 안쪽 회랑 끝 서편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금사천 가는 길 옆 정자 안에 2002년 한국의 다인들이 세운 ‘김지장차 시비’도 발견할 수 있다.

21 1990년 『구화산지』에는 전해오는 이야기에 근거해서 “金沙泉有二. 一在上禪堂西 泉眼邊有石池 巖石上刻 金沙泉三字 相傳爲李白洗墨之處.”라고 하였다(『(修訂本)九華山志』 黃山書社, 1990, p.76 참조).

22『구화시집』에는 ‘금사천’이 두타령 앞에 있다(『九華詩集』 金沙泉. “頭陀嶺前.”)고 1곳만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구화시집』 출판 이후 발간한 『구화산지』에는 앞서 두 인용문에서 보듯이 금사천은 2곳이 있다(“金沙泉有二”)고 하여, 지장탑이 있는 ‘남대’ 외에 ‘두타령’ 앞 무상사 남쪽을 언급하였다. 최근의 『(수정본)구화산지』에도 ‘두타령’은 옛터에 새로 건축한 무상사가 자리한 곳(『(修訂本)九華山志』 “頭陀嶺 … 易無相寺舊址.” 黃山書社, 1990, p.49 참조)이라 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남대 금사천은 후대에 이름 붙여진 곳으로 본래 금사천과는 위치가 멀리 떨어져 있다.

23 이백은 구화산에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이곳과 관련된 시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그의 시를 통해 ‘구자산’이란 본래 이름을 ‘구화산’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24 기록상으로 시 <송동자하산>이 청대에 처음 김지장의 이름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시에 대한 진위여부가 문제될 수 있는데, 원대 초 진암의 기록으로 인해 김지장의 시라는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25『九華詩集』 物産, “黃粒稻 出九華山 舊傳金地藏 自新羅擕種至 … 金地茶 出九華山 相傳金者地藏 自西域擕至 … 五釵松 … 金地藏 自西域來擕種.”

26『종원록(宗元錄)』과 『석문정통(釋門正統』 등 불교사 관련저술들은 송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영향을 받아 편찬되었다. 『불조통기(佛祖統紀)』는 1269년에 중국 송대 지반(志磐, 연대미상)이 쓴 전체 54권으로 된 중국불교사로서, 이전 저술들의 사료조사와 가치비판 등을 보완하기 위해 편찬하였다.

27『佛祖統紀』 卷40 法運通塞志, 17之7, 肅宗 至德元載조. “願國運再清克復疆土. 欲於府東立寺為國崇福. 上皇說御書大聖慈寺額 賜田一千畝 勅新羅全禪師為立規制 凡九十六院 八千五百區.”

28『佛祖統紀』 卷40 法運通塞志, 17之7, 肅宗 至德元載조. “全禪師後往池州九華山坐逝. 全身不壞骨如金鎖. 壽九十九.”

29『다경』의 첫 마디에 “차는 남방의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다(『茶經』 上卷 一之源. 茶字南方嘉木也.)”라고 제시한 것처럼, 차나무는 환경조건이 ‘남방’의 고온다습한 열대나 아열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이에 비해 중국 서쪽을 가리키는 ‘서역’은 – 신강(新疆, 신쟝)의 ‘타림분지(塔里木盆地)’, 중앙아시아, 티베트고원(青藏高原)에 자리 잡은 티베트(西藏)를 거쳐 인도까지도 포함한 지역으로 – 대부분 지역이 차나무가 성장하기 어렵다. 신장지구는 차재배의 북방한계선을 넘고, 타림분지는 초원과 사막지대로서 강수량이 적은 건조한 기후이며 특히 겨울에는 극한의 온도까지 내려간다. 중앙아시아 지역 또한 건조한 기후조건 등이 유사해서 차를 생산하기 어렵다. 고원지대인 티베트도 야채조차 재배하기 어려운 일교차가 심한 한랭건조한 지역이다. 티베트는 당나라 때는 토번(吐蕃)으로, 641년 당 태종 때 송첸캄포(松贊干布, 재위 630-650) 왕의 제2왕비로 시집온 문성공주(文成公主)에 의해 중국의 불교와 문화 및 농업관련기술 등이 전파되었다. 이때 처음 중국 차엽(茶葉)의 수입으로 차 문화가 발전하였고, 차의 무역로인 ‘차마고도’로도 유명하다. 남쪽의 인도는 차가 생산되지만, 1823년과 그 다음 해가 되어서야 영국의 두 형제가 각각 동북부 아삼(Assam)지역에서 야생차나무를 처음 발견하였다.

30 몽정차(蒙頂茶)가 재배되는 사천성 청두(成都)평원 서쪽 몽산(蒙山)은 차 재배최적의 기후조건인 비와 운무로 항상 뒤덮여 있어서, ‘덮여 있는 산(蒙山)’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몽정차’는 당대 최초의 ‘공차(貢茶)’로서 청대까지 1000년 이상을 황실에 진상된 최고 품질의 차로 알려져 있다.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금차(琴茶)>를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몽산 몽정차’를 칭송하는 시문들을 남겼다.

31『宋高僧傳』 卷19 感通篇, 唐成都淨衆寺無相傳. “屬明皇違難入蜀. 迎相入內殿供禮之.”

32 사천 성도에서 당 현종을 만났던 무상(無相)은 선종의 5조 홍인(弘忍)–지선(智詵)–처적(處寂)의 심법을 전수받고, 정중종(淨衆宗)의 선풍(禪風)을 떨쳐 중국 초기 선종사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천성의 현종이 내려준 ‘대성자사(大聖慈寺)’와 만년에 거주한 정중사(淨衆寺)에서 법을 펼치다 세상을 떠났다(자세한 내용은 『宋高僧傳』 卷19 感通篇, 唐成都淨衆寺無相傳 참조).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존재는 잊혔다가, 1908년 발굴된 돈황문서에서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 등의 기록을 통해 ‘인성염불(引聲念佛)’과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妄)’의 3구 법문과 같은 그의 사상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33 안록산의 난으로 성도에 피신한 당 현종과 만난 ‘신라 승 전선사(全禪師)’는 신라 구법승인 ‘무상(無相)’으로 추정된다. ‘무상’과 ‘지장’은 신라 왕족출신의 진골계급인 김씨(金氏)로서, ‘전선사(全禪師)’는 ‘김선사(金禪師)’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의 두 사람이 동시대에 중국에서 유명하다 보니, 성씨가 같고 이름은 모르는 상태(全禪師 즉 金禪師)에서 이를 한 사람의 행적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천 성도에서 구화산에 갔다고 한 『불조통기』의 이 기록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 판단된다.

34『九華詩集』化城寺, “唐建中中 金地藏依止. 禪衆有平田數千畝 種黄粒稻. 田之上植茶 異於他處 謂茗地源. 亭後有五釵松 結寔香羙 皆自新羅移植.”

35 1593년 명대 만력(萬曆) 채립신(蔡立身)이 수정한 『구화산지』 권3에서 금지차와 오채송이 ‘서역’에서 가져온 것에 대해, ‘잘못임. 마땅히 신라라고 해야 함(金地茶 卽地藏自西域(誤. 應爲新羅)携來.)’이라 오류를 지적하고 ‘신라’로 수정하고 있다(『(修訂本)九華山志』, 黃山書社, 1990, p.549 참조). 그런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구화산지』의 견해 외에 다른 참고자료가 없었기에, 『구화시집』의 <화성사> 기록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36『九華山志』 卷8, 物産門10, 茶, 金地茶, “相傳金地藏攜來種.” 이 외에도 원산지를 서역이 아닌 신라로 수정했던 ‘오채송’에 대한 내용은 더 크게 바뀌었다. ‘오채송’에 대해 “松子如小栗三角 其中仁香美 卽五粒松實也. 蘇頌謂 粒當作鬣 謂之五釵松者 釵本雙股 松葉皆雙 故名. 而此松有五葉如釵 有五股 因名爲五釵松耳.”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면, 오채송의 특징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에 비해, 오히려 ‘신라’라는 원산지 표기뿐만 아니라 ‘김지장이 가져온 것’이란 내용까지도 모두 삭제되었다(『九華山志』 卷8, 物產門10 木, 五釵松 참조).

37 이 이름들은 ‘형태’적 특징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황립도(黃粒稻)는 누런색 볍씨 알갱이의 특징을, 오채송(五釵松)은 솔잎 다섯 개의 특징으로 이름 붙여진 것이라 하겠다.

38『九華詩集』 物産, “黃粒稻 出九華山 舊傳金地藏 自新羅擕種至.”

39『九華山志』 卷8, 物產門10 穀, 黃粒稻, “舊傳其種由金地藏自新羅攜來. 穎芒肥粒色殷香軟 與凡稻異.”

40 중국 양자강 이남의 쌀은 동남아지역과 같은 ‘인디카(Indica)’종으로, 낟알이 길쭉하고 밥에 찰기가 없다. 이에 반해 중국북부와 한국, 일본의 쌀은 ‘자포니카(Japonica)’종으로, 낟알이 짧고 둥글며 밥이 찰기가 있다. 따라서 김지장이 구화산에 가져간 ‘황립도’는 이 지역의 인디카종과 다른, ‘신라’의 자포니카종이 지닌 특징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41『化城寺記』 “自此歸山 跡絕人里. 逮至德初 有諸葛節等 自麓登峰 山深無人. 雲日雖鮮明 居唯一僧 閉目石室 其旁折足鼎中 唯白土少米烹而食之.”

42『化城寺記』 “開鑿澞澗 盡成稻田 相水攸潴 爲放生池.”

43『化城寺記』 “夏則食兼土 冬則衣半火 無少長 畬田採薪自給.”

44 주34) 참조

45『九華山志』 卷8, 物產門10 穀, 黃粒稻, “李之世詩 金粟原來是佛糧 僧云移植自殊方 山禽未敢銜遺粒 香缽先擎供法王.”

46『해동역사』는 실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단군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한국 역사에 대해 한‧중‧일 삼국의 많은 문헌들을 인용해 기록한 것이다. 그중 한국의 과일을 소개하면서, 신라의 ‘해송자(海松子)’에 대해 다른 어떤 기록보다 많은 분량을 여러 문헌들을 인용해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김지장의 ‘오채송’이 신라 산임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만 발췌해 비교해 보겠다(자세한 내용은 『海東繹史』 卷26, 物産志1 果類 海松子 참조).

47『九華山志』 卷8, 物產門10 木, 五釵松, “蘇頌 … 謂之五釵松者 釵本雙股 松葉皆雙 故名. 而此松有五葉如釵 有五股 因名為五釵松耳.”

48 여성 머리를 장식하는 ‘비녀’는 꽂는 본체 부분이 하나로 된 ‘잠(簪)’과 끝이 두 갈래로 된 ‘채(釵)’로 크게 구분된다. 따라서 ‘오채송’ 이름 속에 ‘채(釵)’라는 용어는 보통 소나무가 ‘채’라는 비녀처럼 솔잎이 2가닥인데, ‘오채송’의 솔잎은 5가닥임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49『海東繹史』 卷26, 物産志1 果類, 海松子, “新羅五粒松 一叢五葉如釵(四聲本草).”

50『九華山志』 卷8, 物產門10 木, 五釵松, “松子如小栗三角 其中仁香美 即五粒松實也.”

51『海東繹史』 卷26, 物産志1 果類, 海松子, “海松子生新羅 與小栗三角 其中仁香味(大觀本草).”

52『九華詩集』 五釵松, “惟墖寺前有之. 其尤異者 每一株枯死 則旁透一小株耳.”

53『(수정본)구화산지』에서는 ‘古樹名木(1篇3章2節)’에서 황산송과 금전송 그리고 ‘奇松(1篇7章)’에서 봉황송과 영객송 등 9그루를 최근 구화산을 대표하는 소나무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에서도 다섯 잎의 소나무나 잣나무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修訂本)九華山志』 黃山書社, 1990, pp.21-24와 pp.85-86 참조). 이 기록으로 보아, 이곳은 잣나무가 살기 어려운 환경조건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화산에서는 중국에서 명품으로 꼽는 신라 잣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신라의 황립도가 오히려 더 오랫동안 큰 영향을 주었다.

54『海東繹史』 卷26, 物産志1 果類, 海松子, “東夷食之常果, 與中土松子不同(大觀本草).”

55『海東繹史』 卷26, 物産志1 果類, 海松子, “新羅使者 每來多鬻松子 有數等 … 唯玉角香最奇 使者亦自珍之(淸異錄).”

56 당대 육우가 쓴 『다경』은 기존의 차 제조와 도구 등을 정리했음은 물론, 차와 물에 대한 평가까지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다경』의 출현을 계기로, 음차문화는 육체의 건강을 위한 약용과 음료의 실용성을 넘어서 정신을 고양 시키는 도(道)로서 평가받게 된다.

57『茶經』 下卷, 七之事, “本草 木部 茗苦茶 … 令人少睡.”

58『宣和奉使高麗圖經』 卷32, 器皿3. “土產茶味苦澁 不可入口 惟貴中國臘茶幷龍鳳賜團.”

59『봉씨문견기』는 당나라 때 봉연(封演 연대미상)이 785-805년 사이에 당대 사회의 전장제도와 풍습, 고적과 전설 등 ‘보고 들은(聞見)’ 내용을 10권 분량의 저술로 기록한 것이다.

60『封氏聞見記』 卷6, 飲茶, “本草云 止渴 令人不眠. … 開元中 泰山靈巖寺有降魔禪師 大興禪宗 學禪務於不寢 又不夕食 皆許其飮茶. 人自懷挾 到處煮飮. 從此轉相倣效 遂成風俗.”

61 현재 중국에서는 김지장은 24세에 중국에 갔다고 단정(『(修訂本)九華山志』 6篇1章, 名道名僧, 黃山書社, 1990, p.265 참조)하고 있다. 이 해는 719년으로 개원7년(신라 성덕왕 18)이다.

62 개원(開元, 713-741)은 당 현종(玄宗)이 28년간 사용한 연호로서, 김지장이 입당한 개원 중기는 725년 전후 시기가 될 것이다. 김지장이 신라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당나라는 ‘개원의 치(開元之治)’로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문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신라 또한 성덕왕이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어느 때보다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聖德王조 참조). 이에 따라 당대 전성기의 문화들이 신라로 전파되었기에, 이때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차 문화도 신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63 다만 씨앗들이 나무로 성장해서 다시 열매를 채취하려면 세월이 많이 경과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지장은 중국에서 수행처로 적합한 장소가 생기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그 장소가 바로 구화산이 되었다.

64 이 글은 중국문헌에 기록된 ‘서역’과 ‘신라’ 두 지역에 한정시켜, ‘금지차’ 원산지를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귀납논증이 그렇듯이, 앞으로 ‘신라’라는 주장의 가설에 새로운 근거들을 제시해서 보다 가능성이 높은 검증이나 반증이 이뤄질 수도 있고, 나아가 근거만 있다면 문헌기록 외에 제3의 지역도 원산지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신라의 차나무 존재문제를 부각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 글의 주제에 관심을 가진 연구 성과들이 계속해서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References

1 『三國史記』  

2 『三國遺事』  

3 『海東繹史』  

4 『宣和奉使高麗圖經』  

5 『封氏聞見記』  

6 『茶經』  

7 『九華詩集』  

8 『(民國27)九華山志』, 江蘇廣陵古籍刻印社, 1938(1996 復刊本)  

9 『(修訂本)九華山志』, 黃山書社, 1990  

10 『宋高僧傳』 卷20, 「唐池州九華山化城寺地藏傳」  

11 『佛祖統紀』 卷40, 「法運通塞志」  

12 『全唐文』 卷694, 「九華山化成寺記」  

13 『全唐詩』 卷808, <送童子下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