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arch for a New Ontology in the Age of Anthropocene - Focused on the Reinterpretation of Animism and the Nimology of Yi Kyu-bo -

Research
조 성환  Sunghwan Jo1*허 남진  Namjin Heo2

Abstract

This essay is an attempt to interpret Nim ontology of Korea as ‘personal ontology’ of new animism and to dialogue with the Western ‘ontological turn’, an academic movement that has been centered around anthropology and religious studies since the 21st century. The ontological turn in the West seeks an alternative philosophy through non-Western cosmology such as new animism. The concept of ‘person’ in new animism, which has recently emerged in the West, has a lot in common with ‘nim’ in Korean. Both of them have great implications in the era of anthropocene in that they regard non-human beings as ‘person’ rather than a mere ‘thing’ or ‘物(mul).’ In this study we briefly introduce the trend of Western New Animism, which i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Ontological Turn’ of Western anthropology and point out that it is consistent with the ontology of Korean ‘Nim’. By examining the tradition of Nim ontology in Korean thought through Lee Kyu-bo(李奎報) and Han Yong-un(韓龍雲), we explore the possibility of ‘Nimology.’

Keyword



Ⅰ. 머리말

일부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현대는 ‘인류세의 시대’로 규정되고 있다. ‘인류세’란 인간이 지구시스템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1 확실히 오늘날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기후변화나 팬데믹 상황은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인류가 이룩한 산업혁명이 지구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킨 결과이다. 이에 대한 경고로 서양에서는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위험론’과 ‘위기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1986년)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지구의 꿈』(1988)2이 대표적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지구적 위험’을 경고했다면,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은 그에 대한 철학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그 이후로 서양에서 전개된 지구적 위험과 인류의 위기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지구’에 대한 성찰의 촉구이고, 다른 하나는 ‘만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지구에 대한 성찰은 지구를 단순한 환경이나 자원이 아니라 하나의 성스러운 공동체이자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자는 입장으로, 토마스 베리의 ‘지구공동체’ 개념이나 래리 라스무쎈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3의 제언이 대표적이다. 토마스 베리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 사이의 불연속의 결과로 지구적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지적한 뒤에, 지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는 ‘지구공동체론’을 제창했다.4

반면에 만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제인 베넷(Jane Bennett)과 같은 신유물론이나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 등의 신애니미즘이 대표적이다. 제인 베넷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찰스 다윈의 지렁이 연구를 소개하면서, 지렁이도 인간과 지구의 역사에 기여하는 당당한 ‘행위소’(actant)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5 그레이엄 하비는 애니미즘의 재해석을 통해 이 세계는 person들로 가득 차 있고, 이들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6 이상의 두 흐름은 큰 틀에서는 모두 학문의 ‘포스트휴먼적’ 전환으로 분류될 수 있다. 종래의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여 작게는 지렁이, 크게는 지구에게 인간과 같은 속성(활동성, 인격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비서구지역의 비근대적 세계관에서는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가령 인간 이외의 존재자를 단순한 사물이나 물체가 아니라 행위자나 인격체로 간주하는 존재론은 한국어의 ‘님’ 개념을 연상시킨다.7 ‘님’은 일반적으로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을 지칭하는 접미사로 알려져 있는데, 그 대상이 반드시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친숙한 존재라면 모두 ‘님’으로 간주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동화책에 나오는 ‘해님’이나 ‘달님’과 같은 용어이다. 어린이들에게 해와 달은 단순히 천문학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쳐주는 고마우면서도 친근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래서 ‘님’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통은 비단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어에서도 태양을 가리켜 ‘御天道様(오텐토사마)’라고 해서, 우리말의 ‘님’에 해당하는 ‘様(사마)’라는 접미사를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선말기(순종)의 유씨부인이 쓴 수필 「조침문(弔針文)」8도 일종의 님의 정서를 표현한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가 부러진 바늘에 보여준 추모와 연민의 감정은 바늘에 대한 깊은 ‘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정이 든 대상이라면, 설령 그것이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리워지고 애틋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상에 붙이는 이름이 ‘님’이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부러진 책상다리를 붙여 주면서 ‘동병상련’의 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또한 ‘님’에 대한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9

한편 이러한 ‘님’개념이 한국사상사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동학에서부터이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용담유사』에서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ᄒᆞᄂᆞᆯ님’을 사용하였다.10 여기에서 ‘님’은 ‘ᄒᆞᄂᆞᆯ’의 접미사로 쓰이고 있는데, ‘ᄒᆞᄂᆞᆯ’과 ‘한’의 의미상 유사성을 고려하면 ‘ᄒᆞᄂᆞᆯ님’은 ‘큰 님’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가장 큰 님’이 ‘ᄒᆞᄂᆞᆯ님’인 것이다. 이러한 ᄒᆞᄂᆞᆯ님 개념을 바탕으로 최제우는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ᄒᆞᄂᆞᆯ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侍天主). 『신생철학』(1974)의 저자 윤노빈의 통찰을 빌리면, 아무리 신분이 천해도 ‘놈’이 아니라 ‘님’이라는 것이다.11 이것은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인간 존재 안에서의 ‘님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양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면 “인간 존재 안에서 ‘신성’의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어의 ‘ᄒᆞ늘ᆯ님’ 관념에는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어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만물에도 하늘님(天主)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萬物莫非侍天主).12 그 이유는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천지(天地)야말로 가장 큰 ‘하늘님’이자 ‘부모님’이고, 따라서 만물은 그런 하늘님의 자식에 다름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13 그래서 최시형에게로 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인격성을 띤 ‘님’으로 여겨지게 된다.“해도 옷을 입고 달도 밥을 먹는다.”는 그의 말은 이러한 측면을 말해주고 있다.14 어빙 할로웰(Irving A. Hallowell)이나 그레이엄 하비 식으로 말하면, 해나 달도 하나의 ‘person’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1879~1944)에 이르면 ‘님’의 세계관이 「님의 침묵」(1926년)과 같은 문학작품으로 표현되게 된다. ‘하늘님’에서 ‘하늘’이 탈각되고 본격적으로 ‘님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님’의 존재론을 한국문학사에 등장하는 이규보나 한용운에서 확인하고, 그것을 매개로 서양의 최신 존재론과의 대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새로운 한국학으로서의 ‘님학’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최근에 서양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의 ‘person’개념은 한국어의 ‘님’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또한 양자 모두 인간 이외의 존재를 ‘thing’이나 ‘物’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인류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종래에 동학의 천관(天觀)은 서구적인 신관(神觀)의 틀에서 설명되어 왔는데(대표적인 것이 ‘범신론’ 혹은 ‘범재신론’), 최제우나 최시형이 ‘ᄒᆞ늘ᆯ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15 일차적으로 신론보다는 님론의 틀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님론을 학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신학’(Theology)에 대해서 ‘님학(Nim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론에서는 먼저 서양의 신애니미즘의 경향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어서 이규보의 한문학과 한용운의 한글문학에 나타난 ‘님’의 존재론을 살펴본 뒤에, 양자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서양에서의 애니미즘의 재해석

최근 서양에서는 사회과학, 철학, 인류학, 종교학 등에서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전개되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 논의의 핵심은 애니미즘에 대한 재해석이다. 애니미즘에 대한 재해석은 ‘인간-비인간’, ‘문화-자연’, ‘생명-무생명’과 같은 서구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원래 영어의 ‘애니미즘(animism)’은 ‘생명’, ‘숨’, ‘영혼’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말로, “만물에 영(anima)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안적 문명을 지향하는 생태운동의 현장에서 애니미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서구 근대와는 다른 존재론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애니미즘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16

데스콜라의 네 가지 존재론58 http://dam.zipot.com:8080/sites/kjre/images/KJRE_21-013_image/Table_KJRE_66_01_05_T1.png

그 중 대표적인 학자가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후계자인 프랑스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이다. 테스콜라는 인류학에서 관계성에 중심을 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논의를 활성화시킨 장본인으로, 자신의 아마존 연구 경험을 토대로 애니미즘을 첫 번째 존재론으로 제시하면서, 토테미즘(totemism), 자연주의(naturalism), 아날로지즘(analogism)과 더불어 애니미즘을 대표적인 세계관 중 하나로 꼽았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성은 내면성(interiority)과 물질성(physicality)이라는 두 가지 속성에 의해 식별된다. 다시 말하면 내면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의 연속성과 불연속에 따라 인간과 비인간이 분류된다. 그런데 애미니즘의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이 동일한 내면성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고, 다만 물질성의 요소가 다르다고 보는 점에 있다.17 이것은 서구 근대적 세계관[자연주의]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동일한 물질성의 요소를 공유하는 반면에 내면성은 다르다고 본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브라질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Eduardo Viveiros de Castro)에 의하면, “유럽인의 우주론이 신체(자연)의 유일성과 정신(문화)의 다양성을 전제하는 반면에, 원주민의 우주론은 정신(문화)의 단일성과 신체(자연)의 다양성을 전제한다.” 즉 “원주민은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이 모두 같은 종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신체가 다를 뿐이라고 본다는 것이다.18 이와 같은 ‘원주민의 우주론’이 바로 데스콜라가 말하는 ‘애니미즘적 우주론’에 해당한다.

서양에서는 데스콜라의 애니미즘 정의를 바탕으로 비인간 존재들도 person,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새롭게 해석되면서 급부상하고 있는 서양의 애니미즘 논의를 한국학계에 소개한 대표적인 학자는 종교학자 유기쁨과 인류학자 차은정이다. 특히 유기쁨은 애니미즘을 대중화한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 B. Tylor)의 『Primitive Culture: Researches into the Development of Mythology, Philosophy, Religion, Language, Art, and Custom』를 한국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원시문화(1‧2)』, 서울: 아카넷, 2018), 두 편의 논문 「애니미즘의 생태주의적 재조명: 믿음의 방식에서 삶의 방식으로」(『종교문화비평』 17, 2010)와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종교문화비평』 35, 2019)에서 애니미즘을 재조명하면서 탈근대적 애니미즘론의 방향을 탐색하였다. 나아가서 생태계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애니미스트로부터 배울 점은 단지 만물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글에서 논하는 애니미즘론도 기본적으로는 유기쁨의 선행연구와 관점을 따르고 있다.19

일반적으로 종교학 개론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에드워드 타일러의 애니미즘은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용어로 이해되어 왔다.20 하지만 최근의 애니미즘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타일러가 종교의 기원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essence of religion)로서 애니미즘을 논했다는 것이다.21 그레이엄 하비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타일러의 이론이 종교의 기원에 대한 이론으로 잘못 인식되었다고 주장한다.22 하비에 의하면 애니미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영혼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애니미즘으로, 이는 종교의 기원 혹은 본질과 관련된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계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person들의 관계망이자 공동체에 다름 아니라는 신애니미즘(new animism)으로, 최근 들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되고 있는 애니미즘이다. 신애니미즘 연구자인 그레이엄 하비는 애니미스트와 애니미즘을 각각 “애니미스트들은 세계는 person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삶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으로, 애니미즘을 “다른 person들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행동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으로 정의한다.23

하비의 정의에 의하면 애니미스트들이란 인간 이외의 존재도 person으로 인정하는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계는 다음과 같이 인식된다. “이 세계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person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person들은 객체가 아닌 행위주체로 인식되며, 다른 person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person들을 존중하며 살아간다.” 즉 우리가 사는 세계는 person적 주체들이 서로 공경하고 관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 person적 주체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비는 종교를 관계적(relational), 물질적(material), 참여적(paricipative)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person들과의 교섭(negotiation)으로 정의한다.24 종교란 관계적 존재들이 타자들과 함께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참여하는 문제라는 것이다.25 그래서 종교적 행위는 종의 경계를 넘어 존중을(respect) 구축하는 것으로, 다종공동체(multispecies communities)에서 협력을 창출하고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26

서양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시작된 것은 1999년 무렵부터이다. 이 해에 발표된 인류학자 누리트 버드 데이비드(Nurit Bird-David)의 논문은 서양 인류학계에서 시작된 이른바 ‘존재론적 전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27 데이비드에 따르면, 나야카 사람들은 숲 속에 사는 동물들을 인간과 동일한 존재자이자 공동 거주자로 인식했고, 책임감 있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어빙 할로웰(Irving A. Hallowell)이 오지브웨(Ojibwe)족들로부터 배운 통찰은 그레이엄 하비의 신애니미즘 논의에 영향을 주었다. 할로웰은 1930년대 캐나다 중남부에 있는 베르엔스강(Berens River)의 오지브웨에 살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존중하고 인정했다.28 이러한 학습을 바탕으로 할로웰은 ‘person’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는 오지브웨족의 관점에서 person 개념은 인간을 초월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person에는 인간 이외의 존재(other than human beings)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즉 오지브웨족에게 person은 ‘인간 person’, ‘동물 person’, ‘바람 person’, ‘돌 person’ 등을 포괄하는 범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29 그래서 인간이란 수많은 person들의 신체성 중 하나에 불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애니미즘적 세계관 속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는 나무나 바위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은 단순한 tree나 rock이 아니라, tree-person이나 rock-person으로 인식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그레이엄 하비는 애니미즘을 “비인간 존재들도 행위주체로 간주하고 존중하는 태도”라고 규정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애니미스트적 세계관은 지구학자(geologian)30를 자칭한 토마스 베리의 ‘지구공동체’ 개념과도 상통한다. 베리는 전 세계의 원주민들은 ‘모든 존재들의 협의회(Council of All Beings)’와 같은 자생적 형태의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에 대한 인식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는데,31 이러한 지구공동체 개념은 지구와 인간 그리고 비인간 존재를 포함한 지구의 모든 구성원들이 주체라고 하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애니미스트적 세계관과 호응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니미스트들은 어떤 것을 person으로 인식하는가? 버드-데이비드에 의하면 다른 존재들을 인격화한(personify) 뒤에 그들과 사회화하는(socialize)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사회화하기 때문에 그들을 인격화한다는 것이다.32 또한 할로웰은 실질적인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을 경우에만 person으로 인식하고 관계가 형성된다고 하였다. 상호작용 이전에는 모든 존재들은 person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잠재적인 구성원으로 남게 된다.33

그런데 이와 같은 person 인식은 전통시대 한국인들의 사물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자신과 오랫동안 관계 맺어온 사물들에게서 느낀 연대감과 의존감을 한시(漢詩)로 표현하였다. 자신과 “정이 들면” 설령 그것이 책상이나 벼루와 같은 사물일지라도 동반자나 반려자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 일찍이 주목한 연구자는 박희병이다. 그는 이규보의 한시에 나타난 사물인식을 ‘생태적’ 측면에서 분석하면서, 이규보가 사물에게서 연대와 감사의 정서를 느끼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규보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님’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한문으로 표현한 애틋한 사물들은 한국말로 하면 ‘정든 님’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한국어의 ‘님’을 ‘person’의 번역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가령 tree-person은 ‘나무님’, rock-person은 ‘바위님’과 같이 - . 그 이유는 ‘인격(人格)’은 말 그대로 인간 존재에만 한정되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데 반해 ‘님’은 비인간 존재에게도 쓰일 수 있고, 공경하는 태도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34 또한 ‘님’은 단독으로도 쓰인다는 점에서도 person과 유사하다(이에 반해 일본어의 ‘さま(사마)’나 중국어의 ‘主(쭈)’는 접미사로만 쓰인다). 이하에서는 이규보의 한시에 나타난 사물 인식을 ‘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Ⅲ. 이규보의 사물과 친구되기35

박희병은 1999년에 출간된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에서 이규보의 사상을 생태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그의 물론(物論)을 논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이규보는 사물에 대해 두 가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만물일류(萬物一類)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여물(與物)의식이다. 여기에서 ‘만물일류사상’이란 “만물을 일류(一類)로 보네”(萬物視一類, 「北山雜題」)라는 이규보의 시구에서 따온 표현으로,36 중국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만물일체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박희병은 이것을 장자의 제물(齊物)사상의 영향으로 보는데, 다만 단순한 수용은 아니고 이규보가 나름대로 ‘자기화’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0쪽). 그 이유는 이규보의 만물일류사상은 장자의 제물사상에 ‘측은지심’과 ‘자비’와 같은 정서가 결합된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다 같이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 어찌 너(=쥐)만 나무라겠니!

- 「쥐를 놓아주다(放鼠)」37

어찌 타오르는 화롯불이 없으리오만 (너를) 땅에 던지는 건 나의 자비

- 「이를 잡다(捫蝨)」38

(파리가) 술에 빠져 죽으려 하니 맘이 아프네. 살려주는 은근한 이 마음 잊지 말아라.

-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拯墮酒蠅)」39

여기에는 이규보가 쥐, 이, 파리와 같은 미물들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비심을 발휘하여 살려주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규보의 시가 ‘불교시’로 분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40 그런데 박희병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한 애물사상의 발로가 아니라 만물일류사상이 가미된 애물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규보 나름대로의 우주론에 바탕을 둔 애물(愛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조선중기의 김시습의 애물사상보다는 중국의 장횡거나 왕양명에 가깝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시습의 애물사상이 인간중심적인 차등적 물관(物觀)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장횡거와 왕양명은 민포물여(民胞物與)41와 만물일체의 인(仁)과 같이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규보의 사상적 연원에 대해서는 장횡거나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스스로 전개하여 만물일류사상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1-122쪽).

이러한 관점에서 박희병은 만물일류사상에서 우러나온 애물(愛物)의 태도를, 인간중심적인 애물과 구분하여 ‘여물(與物)’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여물’은, 직역하면 “사물과 함께 한다”는 뜻인데, 이 말에 담긴 애니미즘적 의미는 “비인간 존재까지도 이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박희병이 들고 있는 이규보의 여물의식의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날아오는 한 쌍의 저 제비, 옛집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애써 나의 집 찾아 주니, 의당 친구로 대우하리.42

이 문장은 「옛 제비가 찾아오니(舊燕來)」라는 시의 첫머리인데, 여기에서 이규보는 옛 집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비를 “옛 친구로 대하겠다”(以故人待)고 말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친구의 범위에 넣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엄 하비 식으로 말하면 person으로 간주하는 셈이고, 토마스 베리의 “befriending the Earth(지구와 친구되기)”43라는 표현을 빌리면 “befriending the swallow(제비와 친구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박희병은 이 시에는 비록 ‘여물’이라는 표현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동물까지도 친구로 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여물의식의 발로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생물에 대해서도 여물(與物)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동학사상가 최시형이 최제우의 ‘하늘’의 범위를 인간에서 만물로 확장시켜 “만물이 하늘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연상시킨다(萬物莫非侍天主). 이규보는 자신이 사용하던 벼루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 있다(123쪽).

나는 비록 키가 6척이나 되지만(吾雖六尺長)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事業借汝遂).

벼루여!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겠다(硯乎! 與汝同歸).

살아도 너로 말미암고 죽어도 너로 말미암겠다(生由是, 死由是)

- 「소연명(小硯銘)」44

여기에 나오는 與汝(여녀)는 박희병이 명명한 與物(여물)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與(함께)’의 범위가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같은 ‘여물’이라고 하여도 앞에 나온 파리나 쥐의 사례와는 유형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物)에 대한 감정이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고마움’이나 ‘동지애’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희병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 일촌밖에 안 되는 벼루라고 해서 6척의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물(物)인 벼루에 의지함으로써만 나를 실현할 수가 있다는 것, 그 고마움을 생각하면 ‘너’와 ‘나’ 두 존재 사이에 어떤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생사를 함께하고자 한다는 것, 이런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123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즉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의존, 감사, 연대의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나와 벼루가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고마움과 연대감이다. 이 경우에는 ‘여물’의 ‘與(여)’가 단순한 ‘이웃’이나 ‘친구’의 의미를 넘어 ‘동지’나 ‘파트너’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즉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與)’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가 「續折足几銘(속절족궤명)」이다. 이 시는 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고친 후에 쓴 글로, 박희병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이 ‘상호의존적’관계에 있다는 이규보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124쪽).

나의 고달픔을 부축해 준 자는 너요(扶翁之憊者爾乎),

너가 절름발이 된 것을 고쳐준 자는 나다(醫爾之躄者翁乎).

같이 병들어 서로 구제하니(同病相救),

어느 한쪽이 공(功)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孰尸其功乎)45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사물에 대한 의존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과 사물의 상생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병상구(同病相救)”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자신은 책상의 위로를 받았고, 책상은 자신에 의해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상은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도와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박희병도 이런 점에 주목하여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규보는) 物我相救(물아상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 장자의 제물사상에서 출발한 이규보가 장자를 자기화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적 연대성을 깊이 투시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124쪽)

여기에서 박희병은 이규보의 동병상구(同病相救)를 물아상구(物我相救)로 바꿔 표현하면서 이규보가 “장자를 자기화”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기화한 것일까? 여기에서 ‘자기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장자의 제물(齊物) 사상에 ‘무엇’이 추가되어 이규보적인 여물(與物) 사상이 된 것일까? 박희병에 의하면 앞서 소개한 생물들의 사례에서 자기화의 요소는 자비와 애물이다. 그런데 이곳의 무생물의 사례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자비나 애물보다는 감사나 연대의 감정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생물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살려주는 상의(相依)와 상생(相生)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의 발로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상의(人物相依)와 인물상생(人物相生) 관계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장자의 제물사상이나 중국의 만물일체사상과의 차이일 것이다. 제물사상이나 만물일체는 ‘일체성’을 강조하지만, 상의나 상생은 ‘상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앞에서 살펴본 자비와 연민의 사례도 상호성의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하늘이 낳은 물(物)을 도둑질하고(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이 도둑질한 걸 도둑질하누나(爾盜人所盜).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겠니!(何獨於汝討)

- 「쥐를 놓아주다(放鼠)」

여기에서 하늘과 사람, 그리고 쥐는 제각기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늘이 생성한 것을 사람이 훔치고, 사람이 훔친 것을 다시 쥐가 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생성하지 않으면 사람은 먹을 것이 없게 되고, 사람이 훔치지 않으면 쥐도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똑같이(均)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다”는 말은 전후맥락상 단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상호연결성이라는 함축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살고 싶으니까 쥐도 살고 싶겠지”라고 하는 “살고 싶은 욕망”에 대한 공감([均])이 “내가 하늘에 의존해 있듯이 쥐도 나에게 의존해 있다”는 의존관계에 대한 공감과 동시에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기생하고 있듯이 쥐도 기생하고 있으니까, 내가 하늘로부터 도둑질 하듯이 쥐도 나로부터 도둑질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쥐를 살려준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즉 자기와 ‘동일한’ 의존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동일함과 공감을 나타낸 개념이 ‘균(均)’이다.

이와 같이 이규보가 제비나 쥐와 같은 생물은 물론이고, 벼루나 책상과 같은 무생물에게까지 연대와 연민과 공감의 정서를 느낀 것은 조선후기에 유씨부인(兪氏婦人)이 쓴 「조침문(弔針文)」을 연상시킨다. 「조침문」에서 바늘이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고 절찬하는 대목은46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졌다”(事業借汝遂. 「小硯銘」)고 평가한 구절과 상통한다.『장자』적으로 말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덕(德)=역량’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47

아울러 유씨부인이 부러진 바늘에 대해서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생사(一時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48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한다”(生由是, 死由是. 「小硯銘」)고 맹세했던 구절과 흡사하다. 마치 현대인들이 ‘반려동물’을 가족이나 벗으로 여기고 있듯이, 유씨부인과 이규보는 바늘이나 벼루를 ‘반려사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려’의 범위를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 한국어의 ‘님’이다. ‘님’은 상대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고 존경과 연민의 정서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님’이라고 한 것은 사물에게서 ‘님’의 정서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한 것도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님’의 정서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최시형 식으로 말하면 “하늘(=생명)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느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보의 물론(物論)은 님론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소연명(小硯銘)」이나 「속절족궤명(續折足几銘)」은 “님을 노래한 시”, 즉 ‘님가’라고 할 수 있으며, 유씨부인의 「조침문」은 “님을 그리워하는 글(思慕曲)”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규보가 「소연명(小硯銘)」에서 “너를 빌어 사업을 이룬다”(事業借汝遂)고 표현한 것은 최시형이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천인상여(天人相與)”, 즉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여기에서 하늘은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말한다. 최시형에 의하면, 사람은 만물(음식) 속의 하늘(생명력)을 먹고 살아가고, 하늘은 사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양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49 이것을 표현한 말이 ‘천인상여’이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규보가 인식한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人物相與(인물상여)”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물(物)’을 ‘하늘님’으로 표현한 것이 최시형의 동학사상이다. 따라서 이규보와 최시형은, 적어도 물론(物論)의 측면에서는 상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규보에게서도 물(物)을 ‘님’으로 대하는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규보가 인간은 사물에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한 것은, 20세기에 탄생한 한국의 자생종교 원불교(圓佛敎)의 은(恩)사상을 연상시킨다. 원불교의 핵심교리 중의 하나는 사은(四恩)인데, 여기에서 ‘은(恩)’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은 이러한 은혜의 관계를 “천지·동포·부모·법률”이라는 네 가지로 범주화시켜서 사은(四恩)이라고 하였다.50 사은은 불교적인 인과보응의 진리를 은혜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크게는 천지(우주), 작게는 만물이 모두 ‘님’으로 여겨지는 셈이다.

한편 소태산 박중빈과 동시대를 살았던 일제강점기의 문인들은 ‘님’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개벽』지에 발표한 김소월의 「님과 벗」(1922년), 「님의 노래」(1923년)를 시작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년),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1931년)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오자 문인들이 최제우의 ‘ᄒᆞᄂᆞᆯ님’에서 ‘ᄒᆞᄂᆞᆯ’을 떼고서 ‘님’을 단독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님’과 ‘님’의 문학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시기는 서세동점과 일제강점기라고 하는 국가적 위기상황이자 한국인의 미래와 희망이 좌절된 상실의 시기 때문이다. 이 암흑기에 ‘님’이 철학화되고 문학화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희망과 미래에 대한 동경과 의지가 강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일제강점기의 님의 문학 중에서도 특히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님’이라는 말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우주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에 의하면 우주는 서로 얽혀 있고 모두가 동등한 ‘님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한용운은 소태산과 상통한다. 소태산이 세계를 ‘은(恩)’으로 보았다면 한용운은 ‘님’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Ⅳ. 한용운의 님학

한용운 사상에 관한 연구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생태학적 접근이 참고할만하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김옥성의 「한용운의 생태주의 시학」(『동양학』41, 2007)과 정연정의 「한용운의 ‘기룸’과 상생의 시학 – 불교생태학적 관점을 중심으로」(『文학 史학 哲학』25‧26, 2011)를 들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 중에서 특히 김옥성의 선구적인 연구에 의존하여, 한용운의 님학을 신애니미즘이나 이규보의 사물인식과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한용운은 1931년에 쓴 「우주의 인과율」이라는 글에서 오동잎을 예로 들면서, 우주의 모든 존재는 내적 조건(오동잎의 구조)과 외적 조건(외부 환경)으로 이루어진 인과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우주적 인과율’을 설파하고 있다.

가을을 알리는 오동잎 한 잎은 봄바람에 움트던 때에 그 최후가 결정되어 있던 것이다. 오동잎은 일정한 구조가 있고, 일정한 구조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능이 있고, 일정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수명이 있고, 일정한 수명이 있기 때문에 일정한 사멸이 있다 ... 그러나 오동잎 자체의 구조만으로 그 변동의 궤율과 수명의 최후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동잎의 변동은 내적 조건, 즉 자체의 구성 여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 상태, 즉 천재지변, 인위 및 환경의 자연 등의 모든 것이 수동되는 까닭이다. (…)

우주의 인과율은 이러한 것이다. 자연 인사 즉 천체의 운행, 지리의 변천, 풍우상설(風雨霜雪), 산천초목, 조수어별(鳥獸魚鼈) 등 모든 자연과학과 국가의 흥망, 사회의 융체(隆替), 제도의 변개, 인문의 성쇠 등 모든 사회 과학의 상호연락의 공간적 관계와 선후 연결의 시간적 관계가 어느 것 하나도 우주적 인과율의 범주 이외에 벗어나는 것이 없다.51

이 글에서 우리는 한용운이 얼마나 불교적인 인과의 세계관에 철저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인과적 우주론은 한용운이 ‘님’을 노래한 『님의 침묵』(1926)에도 수록되어 있다. 「인과율」이라는 시가 그것이다.

당신은 옛 맹세를 깨치고 가십니다. 당신의 맹세는 얼마나 참되었습니까. 그 맹세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 맹세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옛 맹세로 돌아올 줄을 압니다. 그것은 엄숙한 인과율입니다. 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맞춘 입술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입맞추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가시는 것은 옛 맹세를 깨치려는 고의가 아닌 줄을 나는 압니다. 비겨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의 접촉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의 입술에 댈 수는 없습니다.52

이 시에서 한용운은 연인과의 이별과 재회를 인과율로 설명하고 있다. 맹세를 저버리고 떠난 연인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드러내기도 하고(“이별은 옛 맹세로 돌아올 줄을 압니다.”), 연인과의 이별은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라는 납득이 표현되기도 한다(“당신의 가시는 것은 옛 맹세를 깨치려는 고의가 아닌 줄을 나는 압니다”). 이러한 불교적 인과론은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있다는 연기설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한용운은 「나와 너」라는 시에서 연기적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도 아니오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면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도 없다.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오, 없는 것도 아니다. 갈꽃 위의 달빛이요, 달 아래의 갈꽃이다.(『불교』 88호, 1931년)53

「우주의 인과율」과 같은 해에 쓰여진 이 시에서 한용운은 불교의 연기설을 ‘나’와 ‘너’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나는 우주의 일부이고(“나는 다른 것의 모임”) 우주는 나의 연장이다(“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 즉 나와 우주는 한 몸이고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아시아적인 천인합일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불교적 연기설을 말하고 있지만, 거기에 동아시아적 우주론이 가미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모임”과 “흩어짐”이라는 표현은 장자가 말하는 기(氣)의 취산과 같은 존재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한용운이 ‘이것(此)’과 ‘저것(彼)’ 대신 ‘나’와’너’ 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불교의 연기설을 말할 때에는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다”54는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에서 한용운은 ‘나’와 ‘다른 것’, 또는 ‘나’와 ‘너’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나’와 ‘너’는 신애니미즘의 용어로 말하면 person의 범주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용운이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김옥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만해는) 본질적으로는 인간과 만물이 평등하다는 사상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절대평등”의 견지에서, 자아와 타자는 근대적 세계관에서의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가 된다. (…) 이와 같은 만해의 사상은 부버의 형이상학과 견주어 볼만하다. 부버(…)에 의하면 근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타자를 사물화하고 도구화하는 즉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강력해졌다. 부버는 근대사회의 인간성 상실 현상을 ‘나’-‘그것’의 관계로 진단하고,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인 ‘나’-‘너’의 관계의 회복을 주장한다.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관계는 단지 인간 사이의 관계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예술, 신을 포함한 인식론이자 존재론이다. 그러한 점에서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존재론은 만해사상과 통하는 점이 많다.55

김옥성의 해석을 참조하면 한용운의 ‘나-너’의 존재론은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인격적인 관계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부버의 존재론은 물론이고 신애니미즘의 존재론과도 상통한다. 다만 한용운은 불교사상가답게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평등하다는 연기적이고 화엄적인 세계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파리나 모기와 같은 미물조차도 생명을 지닌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쥐」나 「파리」 또는 「모기」와 같은 시를 남긴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56 흥미롭게도 앞에서 살펴본 이규보 역시 「쥐를 놓아주다(放鼠)」나 “이를 땅에 내려 놓다” 또는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에서 볼 수 있듯이, ‘쥐’와 ‘파리’, ‘모기’에 대한 연민의 정(情)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정서에 대해서 김옥성이나 박희병은 ‘자비심’의 발로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이규보나 한용운도 ‘자비심’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한국사상사라는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님’의 존재론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비록 표현은 불교적 개념을 빌리고 있지만, 최제우나 최시형이 ‘하늘님’이라고 표현하고, 원불교에서 ‘사은님’57이라고 말한 것을 고려해 보면, 만해의 ‘님의 문학’ 역시 한국의 사상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존재론적 전회’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애니미즘을 관계론적 존재론으로 재해석하는 최근 경향에 주목하여, 서양의 신애니미즘과 한국의 ‘님’의 존재론을 연결시켜 한국문학에 나타난 님의 의미를 추적해 보았다. 인간 이외의 존재를 행위자나 인격체로 인식하는 신유물론이나 신애니미즘의 존재론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가 아닌 은혜로운 존재로 인식하는 한국의 ‘님’의 존재론을 연상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 사이의 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담론은 서구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기하고 있다. 인류학 분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는 이러한 인류세 담론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 중의 하나이다. 존재론적 전회의 대표적인 경향들로는 다자연주의, 관점주의 그리고 신애니미즘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된 견해는 비인간적 존재를 주체로 간주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대칭적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일찍이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21세기는 위험이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 지구적 차원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서양에서 애니미즘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근대화 과정에서 비인간 존재들을 도구적인 ‘사물’로 간주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다. 한국의 ‘님’이 다시 호출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양의 신애니미즘과 한국의 님학은 오늘날과 같은 지구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 세계는 님들로 가득 차 있고, 만물을 님으로 대해야 한다는 최시형이나 한용운의 님학을, 또는 어빙 할로웰이나 그레이엄 하비가 말하는 신애니미즘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천지만물과 함께 살 수 있는 공생의 길일 것이다.

요약

본 논문은 한국의 ‘님’의 존재론을 매개로 서양의 존재론적 전회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세 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최근에 서양에서 대두되고 있는 신애니미즘에서는 만물을 ‘person’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존재론은 한국어의 ‘님’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또한 양자 모두 인간 이외의 존재를 ‘thing’이나 ‘物’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인류세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 논문에서는 서양의 존재론적 전회의 흐름 중의 하나인 신애니미즘의 경향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것이 한국어의 ‘님’의 존재론과 상통함을 지적한 뒤에, 한국사상에서의 ‘님’의 존재론의 전통을 이규보의 한문학과 한용운의 한글문학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인류세 시대의 ‘님학’의 가능성과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해 보았다.

주제어

인류세, 존재론적 전회, 신애니미즘, 퍼슨, 님학, 이규보, 한용운

Endnote

1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인류세’ 관련 서적으로는 다음을 들 수가 있다. 얼 C 엘리스, 김용진·박범순 옮김, 『인류세』(파주: 교유서가, 2021); 최평순·다큐프라임 <인류세> 제작팀, 『인류세』(서울: 해나무, 2020);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옮김, 『인류세』(서울: 이상북스, 2018).

2 토마스 베리 지음, 맹영선 옮김, 『지구의 꿈』(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원저는 Thomas Berry, The Dream of the Earth(San Francisco: Sierra Club Books, 1988).

3 래리 라스무쎈, 한성수 옮김,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윤리』(서울: 생태문명연구소, 2017). 원저는 Larry L. Rasmussen, Earth-Honoring Faith: Religious Ethics in a New Key(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4 토마스 베리 지음, 이영숙 옮김,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114쪽. 원저는 Thomas Berry, The Great Work : Our Way into the Future( New York: Bell Tower, 1999).

5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 :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서울: 현실문화, 2020), 제7장 「정치생태학」, 237-244쪽. 원저는 Jane Bennett, Vibrant Matter :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0), pp.94-98.

6 Graham Harvey, 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United Kingdom: C Hurst & Co Publishers Ltd, 2017),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xiii.

7 이하의 ‘님’에 관한 논의는 지구인문학연구소의 기획으로 간행된 『지구적 전환 2021』(서울: 모시는사람들, 2021)에 실린 조성환의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일부를(24-27쪽) 수정한 것이다.

8 유씨 부인 외 지음, 구인환 엮음, 『조침문』(서울: 신원문화사, 2018).

9 이규보, 『동국이상국전집』 제19권 잡저, 「속절족궤명(續折足几銘)」. 『(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III)』(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다리가 부러진 궤(几)를 고침에 대한 명」, 166쪽.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서 상술.

10 최제우 지음, 양윤석 역주, 『용담유사』(서울: 모시는사람들, 2013), 119쪽(「교훈가」), 126쪽, 127쪽(「안심가」), 129쪽(「용담가」). 원문 영인본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서울: 통나무, 2021), 564쪽(「교훈가」), 559쪽(「안심가」), 554쪽(「안심가」).

11 윤노빈은 동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인내천(人乃賤)에서 인내천(人乃天)으로의 혁명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한울이다’는 명제는 ... ‘사람이 賤하다’는 현실적 명제에 대하여 혁명적 명제다 ... 人乃賤的 의식의 귀(耳)에다 人乃天의 복음을 아무리 들려주어 보았자 ‘소귀에 『동경대전』 읽기’다.”[윤노빈, 『신생철학』(서울: 학민사, 2010), 358-359쪽]. 여기에서 ‘賤’과 ‘天’은 ‘천한 놈’과 ‘한울님’이라는 윤노빈의 표현을 고려하면, 각각 ‘놈’과 ‘님’으로 바꿔 쓸 수 있다. ‘놈’과 ‘님’의 대비에 대해서는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서울: 모시는사람들, 2019) 179쪽, 183쪽을 참조.

12 『해월신사법설』「7. 대인접물(待人接物)」. 이규성, 『최시형의 철학』(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154쪽. 이하의 『해월신사법설』 인용은 이 책에 의함.

13 “天地父母”(「2. 천지부모」, 131쪽) “物吾同胞”(「31. 삼경」, 192쪽)

14 『해월신사법설』「2. 천지부모」, 134쪽.

15 ‘ᄒᆞᄂᆞᆯ님’개념이 나오는 『용담유사』는 1880년에 최시형이 편찬한 것이다.

16 유기쁨, 「애니미즘의 생태주의적 재조명: 믿음의 방식에서 삶의 방식으로」, 『종교문화비평』 17(서울: 한국종교문화비평학회, 2010), 235쪽.

17 차은정, 「인류학에서의 탈서구중심주의: 데스콜라의 우주론과 스트래선의 탈전체론을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58(서울: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 313쪽.

18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지음,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서울: 후마니타스, 2018), 305쪽.

19 참고로 일본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도 애니미즘을 초기의 종교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적 감각이자, 인간과 우주(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신애니미즘을 주장한다. 박규태, 「‘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일본비평』 17(서울: 서울대 일본연구소, 2017), 116쪽. “타일러의 애니미즘 이론은 ‘종교의 기원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러셀 T. 맥커천 지음, 김윤성 옮김, 『종교연구 길잡이』(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5), 196쪽.

21 이와 관련해서는 유기쁨의 「애니미즘의 생태주의적 재조명: 믿음의 방식에서 삶의 방식으로」를 참조하기 바람.

22 Graham Harvey,“Animals, Animists, and Academics”, Zygon, vol. 41, no. 1, 2006, p. 11.

23 Graham Harvey, 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6), p. xvii.

24 Graham Harvey, Food, Sex and Strangers: Understanding Religion as Everyday Life(Acumen: Durham, 2013), p. 220.

25 ibid, pp. ix-x.

26 ibid, p. 113.

27 Nurit Bird-David,“‘Animism’ Revisited: Personhood, Environment, and Relational Epistemology. “Current Anthropology, Volume 40, 1999.

28 Graham Harvey, “Animals, Animists, and Academics”, p. 12.

29 Irving A. Hallowell,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 in Culture in History: Essays in Honor of Paul Radin, ed. S. Diamond(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0), p. 21.

30 “He(=Thomas Berry) came to call himself a ‘geologian’. “Mary Evelyn Tucker, John Grim, Andrew Angyal, Thomas Berry : A Biography(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 p. 120.

31 토마스 베리 지음, 이영숙 옮김, 『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36쪽.

32 “Nayaka’ do not first personify other entities and then socialize with them but personify them as, when, and because [they] socialize with them’.” Danny Naveh, Nurit Bird-David, “How Persons Become Things: Economic and Epistemological Changes among Nayaka Hunter-gatherers,”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20, 2014, p. 83.

33 Miguel Astor-Aguilera·Graham Harvey(eds.), Rethinking Relations and Animism : Personhood and Materiality(New York:Routledge, 2018), pp. 44.

34 참고로 유기쁨은 애니미스트들의 person의 용례를 소개하면서 person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개체’, ‘개성’과 같은 번역어로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person의 의미를 담을 수 없다고 하면서, ‘사람’이라는 번역어를 임시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유기쁨, 〈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온라인) 468호, 2017년 5월 2일자.

35 이 장은 2021년 3월 19일에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있었던 원불교사상연구원 주최 학술대회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에서 발표한 조성환의 「인류세 시대의 한국철학 : ‘님’을 노래한 시인 이규보」를 수정한 것이다.

36 박희병, 『한국의 생태사상』(파주: 돌베개, 1999), 120쪽. 이하에서는 본문의 괄호 안에 쪽수만 표시.

37 “均爲口腹謀, 何獨於汝討.”『동국이상국전집』 제16권 「고율시(古律詩)」. 『(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Ⅲ)』(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43쪽.

38 “豈無爐火熾, 投地是吾慈.”『동국이상국후집』 제4권 「고율시(古律詩)」. 『(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V)』(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261쪽.

39 “墮來輒死眞堪惜, 莫忘殷勤拯溺慈.” 위의 책, 251쪽.

40 가령 신영순, 「이규보 불교시 연구」(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3) 등.

41 “민포물여(民胞物與)”는 “民吾同胞, 物吾與也”의 준말로, 직역하면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내가 함께 한다”는 뜻이다.

42 “翩翩一雙鷰, 知有舊巢在, 勤尋我宅來, 當以故人待.”『동국이상국후집』 제9권 고율시(古律詩), 「구연래이수(舊鷰來二首)」. 『(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Ⅵ)』(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168쪽.

43 Thomas Berry with Thomas Clarke, Befriending the Earth: A Theology of Reconciliation Between Humans and the Earth (CT: Twenty-Third Publications, 1991). 우리말 번역은 토마스 베리 ‧ 토마스 클락 지음, 김준우 옮김,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 인간과 지구의 화해를 위한 대화』(서울: 에코조익, 2006).

44 『동국이상국전집』 제19권 「잡저(雜著)」. 『(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Ⅲ)』, 166쪽.

45 『동국이상국전집』 제19권 「명(銘)」. 위의 책, 166쪽.

46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 너는 미묘한 품질과 특별한 재치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능라(綾羅)와 비단(緋緞)에 난봉(鸞鳳)과 공작(孔雀)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유씨부인 외 지음, 구인환 엮음,『조침문』(서울: 신원문화사, 2018), 15쪽.

47 임태규가 지적하듯이, 장자에서의 덕은 “개인의 존재 가치를 발휘하는 내재적 역량이나 힘과 관련된 용어”이다. 임태규, 「장자 ‘덕’ 개념의 미학적 해석 : 예술 주체의 관점을 중심으로」, 『미학 예술학 연구』 31(서울: 한국예술미학학회, 2010), 259쪽.

48 유씨부인 외 지음, 앞의 책, 17쪽.

49 “人依食而資其生成, 天依人而現其助化. 人之呼吸動靜屈伸衣食, 皆天主造化之力. 天人相與之機, 須臾不可離也.”『해월신사법설』, 「2. 천지부모」, 134쪽.

50 원불교의 ‘사은(四恩)’ 개념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온라인) ‘사은(四恩)’ 항목 참조.

51 한용운, 『한용운전집(2)』(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6), 295쪽, 300쪽.

52 한용운, 『한용운전집(1)』(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6), 67-68쪽.

53 한용운, 『한용운전집(2)』, 351쪽.

5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온라인) 「연기(緣起)」 항목.

55 김옥성, 「한용운의 생태주의 시학」 (『동양학』 41, 2007), 13-14쪽.

56 위의 글, 18쪽.

57 〈법신불 사은님〉, 《한울안신문》, 2012년 8월 20일자.

58 Philippe Descola, Beyond Nature and Culture(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3), p. 122.

References

<1차자료>

<2차자료>

1 이규보,『(고전국역총서) 동국이상국집』,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2 최제우, 양윤석 역주,『용담유사』,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3.  

3 한용운,『한용운전집』, 서울: 불교문화연구원, 2006.  

4 김옥성,「한용운의 생태주의와 시학」, 『동양학』 41(용인: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7)  

5 래리 라스무쎈 지음, 한성수 옮김,『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윤리』, 서울: 생태문명연구소, 2017.  

6 러셀 T. 맥커천 지음, 김윤성 옮김,『종교연구 길잡이』, 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15.  

7 박규태,「‘신불(神佛) 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가미(神)와 호토케(佛)의 유희」, 『일본비평』 17, 서울: 서울대 일본연구소, 2017.  

8 박희병,『한국의 생태사상』, 파주: 돌베개, 1999.  

9 신영순,「이규보 불교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3.  

10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인류세』, 서울: 교유서가, 2021.  

11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지음, 박이대승 · 박수경 옮김,『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서울: 후마니타스, 2018.  

12 유기쁨,〈애니미즘의 재발견과 “person”의 번역〉,《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온라인) 468호, 2017년 5월 2일자.  

13 _____ ,「애니미즘의 생태주의적 재조명: 믿음의 방식에서 삶의 방식으로」,『종교문화비평』 17, 서울: 한국종교문화비평학회, 2010.  

14 유씨부인 외 지음, 구인환 엮음,『조침문』, 서울: 신원문화사, 2018.  

15 윤노빈,『신생철학』, 서울: 학민사, 2010. 

16 이규성,『최시형의 철학』,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  

17 임태규,「장자 ‘덕’ 개념의 미학적 해석 : 예술 주체의 관점을 중심으로」, 『미학 예술학 연구』 31, 서울: 한국예술미학학회, 2010.  

18 제인 베넷 지음, 문성재 옮김,『생동하는 물질 :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서울: 현실문화, 2020.  

19 지구인문학 연구소 기획,『지구적 전환 2021』,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1.  

20 차은정,「인류학에서의 탈서구중심주의: 데스콜라의 우주론과 스트래선의 탈전체론을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 58, 서울: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0.  

21 최평순, 다큐프라임 인류세 제작팀 저,『인류세』, 서울: 해나무, 2020.  

22 클라이브 해밀턴 저, 정서진 옮김,『인류세』, 서울: 이상북스, 2018.  

23 토마스 베리 지음, 맹영선 옮김,『지구의 꿈』,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  

24 토마스 베리 지음, 박만 옮김,『황혼의 사색: 성스러운 공동체인 지구에 대한 성찰』,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25 토마스 베리 지음, 이영숙 옮김,『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26 토마스 베리·토마스 클락 지음, 김준우 옮김,『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 인간과 지구의 화해를 위한 대화』, 서울: 에코조익, 2006.  

27 Astor-Aguilera Miguel·Harvey Graham(eds.), Rethinking Relations and Animism: Personhood and Materiality, New York: Routledge, 2018.  

28 Bird-David Nurit, “‘Animism’ Revisited: Personhood, Environment, and Relational Epistemology.” Current Anthropology, Volume 40, 1999.  

29 Descola Philippe, Beyond Nature and Cultu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3.  

30 Hallowell A. Irving, 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 In Culture in History: Essays in Honor of Paul Radin, S. Diamond(e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0.  

31 Harvey Graham, Food, Sex and Strangers: Understanding Religion as Everyday Life, Acumen: Durham, 2013.  

32 ______________ , 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 United Kingdom: C Hurst & Co Publishers Ltd, 2017.  

33 ______________ , “Animals, Animists, and Academics,” Zygon, vol. 41, no. 1, March 2006  

34 Naveh, Danny, and Bird-David Nurit, “How Persons Become Things: Economic and Epistemological Changes among Nayaka Hunter-gatherers”, The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20,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