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ligion and Education after the Corona Pandemic - From the Perspective of Korean Integral Studies for Faith(信學) and Humanity(仁學)

Research
이 은선  Unsunn Lee1*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a path forward for Korean society and human civilization after the today’s Corona Pandemic. Especially focusing on religion and education, it reflects on what kind of New Normal life and way are available since then. In this view, this paper recognizes that principal religious thinking, which has played leading role until the current pandemic reality can be regarded as Western Judea-Christianity, specially since the modern era of humankind. So this reality asks to consider another different human religious legacies, and to me, East Asian immanent religious spiritualities appear to have many alternative reliable points in overcoming today’s Pandemic situation. In particular, Korean Neo-Confucian thinker of the 16th century, the master Toegye(퇴계 이황, 1501-1570) likes to give abundantly important messages which can help to explore other directions of human religion and education after the Pandemic. So we examine Toegye’s ‘10 Diagrams on Sage Learning(聖學十圖)’ by communicating with German postmodernist philosopher Peter Slotterdike's ‘Anthropotechnik(人間工學)’. In all doing, this paper considers that the reality we are facing now is no longer a matter of which name we give to any extrinsic transcendental God, but that it is fundamentally a question of human epistemology if there might have remained any possibility to believe in any transcendental dimension of life, or in what kinds of higher meaning left beyond our now and here’s life. We call the study on this question as ‘Korean Intergral Studies for Faith(한국 信學)’ as well as ‘for Humanity(한국 仁學)’. This quest will show that religion, education, politics, and culture etc. which have been commonly explored separately, will be revealed as one body of the question of "Korean Integral Studies for Faith" in finding out a possible "transcendental vaccine" on behalf of our post-corona era.

Keyword



I. 시작하는 말-코로나 팬데믹과 인류 근대 문명의 ‘경제 제일주의’

오늘 우리가 범인류적으로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의 대도시 우한에서 첫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1월 7일 중국의 의료전문가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부르기 시작해서 WHO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코로나 19(COVID-19)가 된 후, 1월에 첫 사망자가 보고된 지 무려 4개월 만에 전 세계 200여 개국으로 퍼져나갔다. 지난해 인류는 그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이 글을 쓰는 2021년 봄까지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아 그동안 발 빠른 대처로 여러 종류의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아직도 미국이나 인도, 브라질과 이란, 이라크 등, 전 세계 감염자가 1억 4천만 명이 넘었다. 사망자도 3백만이 넘었으나 여전히 하루 확진자 수가 수십만을 헤아린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1918년 2년 동안 5억 명이 감염되어서 1천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낸 스페인 독감과 비교되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 손실과 인류 문명에 미친 영향으로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이나, 아니 그보다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출애굽하는”시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늘 많은 사람이 인정하듯이 이번의 코로나 팬데믹은 비록 그 발생이 중국 우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어느 한 지역이나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1 그것은 전 세계의 문제이고, 단순히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전 세계를 석권한 서구 자본주의와 시장 만능주의,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제일주의와 밀접히 연결되어서 그 비인간성과 물질주의적 탐욕이 불러온 사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장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오고, 여기서 참으로 예상 밖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는 나라 중의 하나인 미국 국민 중에서도 특히 의료보험도 없이 시간당 임금을 받는 2,300만 명의 생계급여자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번 코로나 팬데믹이 단지 자연적 재난만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인 것이 더욱 드러난다. 한국에서도 그 현상이 두드러져 백화점 경기나 초 상위 부유층의 상황은 오히려 더 호황을 누리지만, 소상공인, 택배노동자 등의 플랫폼 노동자와 여러 열악한 돌봄 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또한, 아직 사회적 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세대와 그 중에도 20대 여성들의 처지가 여기에 더욱 좌우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서2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최상의 보호책은 자본주의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능력이다”라는 지적까지 나오게 되었다.3

이렇게 이번 팬데믹의 기습으로 인류는 지금까지 소위 세계 선진국으로 자처해온 나라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19세기 이후로 서세동점의 기세 아래 서구 ‘자유 민주주의’국가가 이끌어온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어떻게 뼛속까지 곪아 있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칼 폴라니가 선구적으로 지적한 대로 사회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어서(disembedded)” 국가와 정치가 오로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렇지만 거기서 완전히 돈의 노예가 된 초국적 자본주의가 그것을 선도적으로 이끌어온 나라들 국민조차 구하지 못하고, 오직 소수 자본가만을 배불려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4 올봄까지 세계 최고의 희생자를 낸 미국의 사망자 수는 60만에 육박하고, 프랑스나 영국, 독일 등 서유럽 나라들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이것으로써 지금까지 근대 이후의 인류 문명을 논할 때, 이 ‘근대’라는 것도 서구 중심의 역사 해석 틀이지만, ‘동양 대 서양’이라는 단순한 틀과 특히 거기서의 “비대칭적” 평가 속에서 중국을 비롯한 비서구를 논해온 것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가가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트럼프 前 대통령은 코로나바이러스를 끝까지 ‘우한’ 내지는 ‘중국 바이러스’라고 칭했으며, 한국의 보수 정치와 특히 기독교 종교 그룹에서도 이것을 따랐다. 그 여파로 현재 미국 등지에서 아시아 포비아 내지는 황백 인종 갈등이 심각한데, 그렇게 단순한 ‘동양대 서양’, ‘중국 대 미국’의 이분법적 사고는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현재 서구에서 진행되는 ‘탈중국화’ 논의나 미국과 중국을 대척점으로 한 ‘신냉전’ 시대의 도래는 점점 현실화되어가고 있다.5

II. 코로나 팬데믹과 아시아적 종교의 귀환

예전 아시아 4마리의 용이라고 불리던 한국, 타이완, 홍콩 등 유교 문명권 나라들의 코로나 팬데믹 선방이 주목받고 있다. 그래서 유교 문명의 긍정성이 다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것을 애써 외면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다. 물론 이번 바이러스 발원지가 중국인 것이 거의 확실하고, 초기 대응에서 국가주의 힘으로 사실을 감추고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또한 그러한 일을 하는 오늘의 중국이 과연 여전히 유교 국가냐 하는 물음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이나 대만 등의 선방을 오로지 촛불 혁명을 일으킬 정도의 서구 민주주의 발달 이유 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거기에는 자신이 병에 걸리는 것보다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이 더 신경 쓰인다는 유교적 공공성 관념과 팬데믹 창궐의 최전방에서 온갖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사회적, 직업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인 수많은 의료 관계자들과 주변 동역자들의 ‘공적 의식’이 있었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잘 작동된 국가와 질병관리본부 등의 사회적 공권력의 ‘권위’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디지털 생명정치’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높은 디지털 정보력과 문해력을 바탕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지금까지 한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기성의 가치체계가 문제를 일으키고 더는 작동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거기서 떠나고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우리 종교적 삶에 적용해 보았을 때 지금까지 인류 지구적 삶을 이끌어왔던 기성 종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함을 말해준다. 서구 기독교의 어거스틴은 일찍이 ‘내가 나의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진정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이 진정 ‘최고’와 ‘최선’, 삶의 목적과 토대를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6 바로 오늘 우리 시대에 이러한 질문이 다시 물어져야 하고, 여기서 기존의 대답이 오늘과 같은 全 지구적 생태계의 교란, 코로나 팬데믹을 몰고 온 것으로 밝혀졌다면 그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 이러한 모색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병리학적인 언어로 말해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을 위한 새로운 ‘면역체계’를 세우는 일이 될 것이고, 종교교육학회의 학술 자리도 그와 같은 탐색을 위한 자리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오늘 지구 생태계 삶을 불러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종교적 사고는 서구 유대·기독교의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 사고는 근대 인류 과학 문명의 도래를 위해서 지대한 역할을 했고, 오늘의 과학 문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근대 과학 문명은 인간 삶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초월적 차원’을 거의 탈각시켰고, 철저한 세속화와 탈종교화를 불러왔다.

19세기 말 한국 민중은 이러한 서구 기독교를 주로 그 선교사들을 통해서 만났지만, 여기서 그들은 이전 어떤 다른 종교체계를 통해서보다도 더욱 직접적이고 보편적으로 초월의 ‘인격성’을 경험할 수 있었고, 더불어 자신의 인격적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훨씬 더 강력한 윤리적 실천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다시 21세기 한국 현실에서 기독인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 체계의 신·인(神人) 분리와 성·속(聖俗)의 분리를 과도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적용하면서 심한 영·육 분리주의의 이중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잘 드러났듯이, 공동체 전체의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대면 예배를 고수하고, 누구나 받아들이는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보수성을 보이고 있다.

본 논문은 이상과 같은 현실에 대한 가장 절실한 대항마는 바로 다시 ‘초월(the transcendence)’과 ‘거룩(the sacred)’을 이 세상과 연결하고, 그 초월을 인간 마음과 몸과 여기 이곳에서 찾는 내재적 종교성의 차원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하여 세계와 생명이 더이상 어떤 죽어있는 ‘대상(物)’이 아니라 살아있는 ‘易’이고, ‘관계(relatedness)’이며, 그것도 매우 중첩적인 의미에서 수많은 층과 장소와 움직임이 연결되는 ‘신비(mysterium)’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을 말한다. 그 관계망의 신비는 인간의 감각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기적(miracle)’과 ‘역설’, ‘이율배반’이나 ‘신적 동시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을 넘어 불교와 대화하는 한 인지과학자가 그것을 ‘텅 빈 자아(the void Self)’로 표현하거나 우리 논리적 분석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위수준의 이해를 요청하는 “살아가고 있는 주체(living Subjectivity)”라고 이름 지었다면, 그러한 이름이 오늘의 상황에서 훨씬 더 큰 의미를 준다는 뜻에서이다.7

III. 정신(靈, spirit)과 인격적 신비로서의 인간 이해와 한국적 종교 교육학 내지는 교육인지학(人智學)으로서의 ‘한국 信學’

이렇게 오늘 팬데믹 상황에서 근대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관을 넘어 동양적 내재신관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거기서의 세계 인식이 생명의 역동성과 자기 창조성, 만물을 관계로 보면서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더욱 크게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나 ‘리일분수(理一分殊)’, ‘리기묘합(理氣妙合)’ 등으로 표현되고, ‘불연기연(不然其然)’과 ‘물물천(物物天, 물건마다 하늘)과 사사천(事事天, 일마다 하늘)’을 말하며,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인간에서 천지가 하나 됨)’을 밝히고, 단순한 심장이나 뇌가 아니라 ‘심뇌(心惱)’를 강조하는 등의 언술이 바로 그러한 표현들이라고 생각한다.8 또한 조선의 성리학자 퇴계 선생이 말년에 당시의 젊은 신세대 학자 기대승과 대화하면서 ‘氣(땅)’의 존재에 대해서 더욱 주목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理(하늘)’의 역동성과 창발성, 구체적인 인격적 만남에 대한 나름의 성찰을 통해서 성즉리(性卽理)를 넘어서 ‘천즉리(天卽理)’를 말하고, 그 리 자체를 행위의 주체로 보는 ‘리도설(理到說)’을 밝히고자 한 것도 모두 유사한 표현이라고 본다.9

서구에서도 20세기 니콜라이 A. 베르댜예프와 같은 러시아 사상가는 근대 이후 서구 신 이해와 인간 이해가 과도한 관념적 일원론(헤겔이나 피히테 등)이나 그 반대로 과학주의적 자연론과 유물론에 빠지는 위험성을 보고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는 전통의 서구 기독교적 이원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론으로 굳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다시 인간 ‘정신’과 ‘인격’의 초월적이고 신적인 차원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한 자신 입장을 “정신적 인격주의(spiritual personalism)”로 명명하는데, 그것은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 초월과 내재 등의 경직된 이원론을 넘어서면서도 결코 그 이원적 긴장성을 놓치지 않고서 인간 정신과 인격의 높은 초월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격(personlity)’은 단순히 자연이나 사회의 산물이 아닌 세계에 들어온 신적“돌입이며 침노”이다. 그것은 무한히 개방되어 있어서 무한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 속에 무한히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면서 우주가 오히려 인격의 일부이지 그 반대가 아니고, 그 인격의 핵은 정신(靈, the spirit)과 자유(freedom)라고 보았다.10 그렇게 ‘영(靈)’과 ‘정신(精神, spirit)’, 또는 ‘자유’로서의 인격은 동아시아적 언어로 하면 그 안에 ‘몸(身)’과 ‘혼(魂)’, ‘정신(靈)’의 세 차원을 모두 포괄하면서, 그러므로 인간 존재에 대해서 몸이 가지는 권위도 온전히 인정하기 때문에 일상의 ‘빵’ 문제도 바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을 밝히는 정신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11

그는 그러한 인격의 핵심은 자유(freedom)라고 보았다. 그러나 결코 거기서의 자유는 특히 오늘 21세기 공동체 삶에서 가장 심각한 인간 정신병으로 만연해있는 자아 중심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인격의 정신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세상에 대한 사랑(amor mundi)과 책임으로 세상과 타자가 자신 속에 무한히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서 그 관계와 역동성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책임을 지면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정신의 창조적 힘을 말한다.12 참된 창조성이고, 역동적인 판단력이며, 상전이나 노예가 아닌 한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노동할 수 있고, 인내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고 행위 하면서 지금 여기의 감각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영원(eternity)’을 그리며, 그래서 앞으로의 시간과 이 세상의 지속에 대해서도 이 사람에게 기댈 수 있는 “신뢰와 믿음의 그루터기” 같은 사람인 것이다.13

오늘 우리의 교육은 이러한 정신적 자유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온통 돈 버는 기계와 노동하는 육체에만 관심하고, 인간의 마음조차도 단지 자연과 사회의 산물로 여긴다. 그리하여 그러한 학교 교육 옆에 온갖 자기계발 교육과 치료가 성행하고 있지만, 그러한 돈벌이 방식의 교육은 ‘거룩’과 ‘숭고’의 관점에서 인간 마음과 본성, 인격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베르댜예프는 20세기 초의 유럽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근대 유럽의 산업 자본주의적 인간교육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서 ‘신지학(神智學)’ 또는 ‘인지학(人智學)’의 ‘정신과학적’교육을 밝힌 것조차 인간을 너무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자연주의이고, 反인격주의라고 비판했다.14 하지만 슈타이너도 유사한 위기의식 속에서 ‘몸(精/身)’과 ‘혼(命/氣)’과 ‘영(性/心)’을 모두 포괄하는 “자유의 교육”을 주창한 것이다.15 그의 염려대로 오늘 교육은 철저히 탈 종교화 되고 탈 정신화되어서 참된 정신과 실존적 자유에로의 통합교육은 멀찌감치 사라져버렸고, 단지 이류 로봇이나 아류 AI를 기르는 기계주의적 죽은 교육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본인이 보기에 이러한 인간 정신적 정황은 이제 여기서 추구되는 초월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느냐의 전통 종교나 신학(神學) 물음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더 근본적으로 도대체 우리 인간 삶에서 여전히 그러한 추구가 가능한지,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여기 지금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과 뜻과 방향이 있어서 그 추구를 진정 의미 있다고 여기는지의 물음과 관계되는 우리 정신의 더 깊은 ‘인지’와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더이상 신학(神學)과 신과 하느님에 대한 말(God-Talk)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믿음(信)’의 가능성, 신뢰와 서로가 서로를 관계시킬 수 있는 사이와 이음의 능력이 남아있느냐는 문제로 보는 것을 말하는데, 본인은 이것을 우리 시대는 ‘신학(神學, theology)’이 아니라 거기서의 믿음의 가능성이 탐구되는 ‘신학(信學, fideology)’이 관건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하였다.16 또한 이러한 질문은 그대로 우리 교육적 물음이 되어서 여기에서 ‘신학(信學)’, ‘믿음의 학’은 다른 말로 하면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종교 교육학’, 또는 ‘한국 교육인지학’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여기는데, 과연 그 모습이 어떤지의 탐색이 펜데믹 이후 한국 교육학적 탐구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IV. 종교와 교육의 관계-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공학(Antropotechnik)의 예

아직 오늘과 같은 코로나 팬데믹을 겪지 않은 2009년에 출간되었지만, 독일의 슬로터다이크는 자신의 책『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에서 인간을 무엇보다도 ‘호모 이무놀로기쿠스(homo immunologicus)’, 즉 ‘면역학적 인간’이라고 규정한다.17 그러면서 “모든 역사는 면역체계의 투쟁사다”라는 선언과 함께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자신의 생명을 지속시키고 연장하며 발전시키기 위한 면역체계 구성과 단계화의 역사로 밝혔다. 거기에는 단순한 생물학적 면역체계 말고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그가 가장 집중해서 추적하기로는 특히 철학뿐 아니라 종교의 역사까지도 바로 좀 더 최적화되고 진보된 정신적, 사회문화적 면역체계를 얻기 위한 인간 투쟁사라고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나 ‘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를 넘어서 19세기에는 ‘생산(Produktion)’하는 자의 특징을 띠었고, 20세기에는 ‘성찰성(Reflexivitaet)’의 특징을 띠었다. 그리고 21세기로부터 미래에는 ‘수련(Exerzitium)’이라는 표지 아래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18 아닌 게 아니라 그도 지적했듯이, 1900년 무렵부터 쿠베르탱(1863-1937)이 그리스 올림픽 경기의 전통을 살리고 새로운 올림픽의 스포츠 숭배가 시작된 이후로 오늘 인간 문화에서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포츠는 가장 강력한 숭배종교(Kultreligion)가 된 것 같다.19 그런데 여기서 ‘인간공학’이란 오늘의 인간 시기를 ‘기술적 동물(animal technologicum)’시기로 보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형성이자 자기 자신의 변형을 위한 ‘자기 수련(askesis)’의 방식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특히 그는 20세기 이후의 폭발적인 스포츠 숭배에 대해서 “자기 수련의 재-신체화” 내지는 “탈영성화”를 말하면서 “현세에서 육신의 부활”을 키워드로 가지고 있던 19세기 유럽 철학 운동은 “청년 헤겔 주의의 가장 명시적인 실현”이었다고 지적한다.20

그렇게 일종의 기술공학으로서의 인간공학을 말한 슬로터다이크도 궁극적으로는 “초월적인 면역성”, 또는 “절대적 면역성”에 대해서 말한다.21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확실하다’라는 서구 기독교 초기의 언표가 지시하는 대로 인간공학의 면역학적 인간학 추구도 결국 신의 문제와 몸의 죽음 물음과 다시 대면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여기서 슬로터다이크는 기독교 전통의 바울을 “안절부절못하는 간질병자”라고 폄하하면서22 고대나 중세 기독교적 ‘자기 포기’의 금욕적 수행 틀을 벗어나서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자기 형성’으로서의 자기 수련 정신에 천착한다. 그와 같은 탈기독교적이고 반동적인 계보의 선구자 니체나 미셸 푸코를 특히 따르면서 그는 철저히 자기 수련의 세속화와 영성의 비공식화를 통해서 밝히기를, 이제 기술적 동물 존재로서의 인간은 “기술을 가지고 기적을 반복하라는 요구”가 만인에게 제기된 시대에 들어섰다고 선언한다.23 즉, 인간 삶은 예전에는 소수의 귀족이나 수도원의 금욕하는 종교인들이 행하던 일을 만인이 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섰고, 그래서 예전에는 학벌이 높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 면역체계들을 확장해 왔고 그것의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특권을 가지고 지배자와 권위가 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만인이 ‘자기 수련’과 ‘자기 수행’의 인간공학을 통해서 스스로 면역체계의 창조자가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본인은 이러한 입장을 매우 급진적인 ‘聖의 평범화’와 강력한 세속화의 선언으로 보았다.24

슬로터다이크는 마지막으로 이미 1980년 말 유럽에서『책임의 원리』저자 한스 요나스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로서 “전 지구적 위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각자의 개인적인 개별 면역을 “공-면역(Ko-Innunitaet)”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밝힌다.25 즉 오늘 이러한 모든 개별 면역의 추구도 포함해서 인간 삶 자체가 자리하는 지구 존재 자체가 크게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에 인간공학은 ‘공(公)면역’과 ‘집단면역’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아직 몰랐던 2021년 코로나 팬데믹 현실을 우리가 겪으면서 그러한 공면역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처방이기도 한 인간공학 방식으로서의 이 백신 접종 일에서도 오늘 지구상에서 가장 부자나라인 미국이나 유럽은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서 그것을 같은 식구의 마음으로 나누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자국 중심주의나 민족주의적 갈등, 인종주의가 나타난다. 또한 각 개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오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면역 접종을 받는 일에 그치지 않는 것을 본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물음으로서 근본적으로는 다시 ‘믿음’과 ‘신뢰’의 물음이라는 것, 거기에는 자신(의 면역체계)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겠는가의 일이 있고, 공적으로 범사회적 면역체계 형성을 주도하는 공적 권위에 대한 신뢰 등, 여러 차원의 믿음과 신뢰의 물음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여러 차원의 중층적 믿음과 신뢰 물음과 함께 다시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타자와 어떻게 ‘선한 사이’를 만들어서 지금 여기의 ‘노말’을 넘어서 ‘뉴노멀’로 상승시킬 수 있는가 하는 몸적, 감정적, 정신적 능력 등과 관계되는 다차원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슬로터다이크도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지향할 때만 나아갈 뿐이다”라는 말도 했고, “사실 윤리는 숭고의 경험에만 기초 될 수 있다”라는 언술도 했다.26 이것은 그의 기술공학적인 인간공학적 추구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수직적 긴장(초월로의 상승)”으로서의 인간 종교적 형이상학적 갈등이라고 보는바, 본 연구자는 그 ‘숭고’와 ‘불가능한 것’, ‘초월’의 경험이 그가 그렇게 탈종교를 외치며 모든 종교를 일종의 세속적 자기 수행과 자기 수련으로 환원하며 유물론적으로 생각하고 기획하는 것처럼 우리 ‘신체’를 통해서만, 또는 오직 여기 지금 현실의 ‘나 자신’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말하고자 한다. 그렇게 21세기 기계적 ‘인간공학’을 통해서 이루려는 그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시도는 많은 한계를 가진다. 본인은 그보다는 훨씬 더 다차원적이고, 역동적이며, 정신적이고, ‘과거’라는 토대, 그리고 그 과거의 시공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는 전승과 전통과의 만남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가 이제 버릴 것으로 치부한 ‘인격’이라는 개념, ‘자유, ‘실존’, ‘믿음’, ‘관계’ 등의 언어를 중시하고, 한편으로 본인 한국 신학(信學, fideology) 방식도 그의 인간공학처럼 탈형이상학적으로 여기 지금의 몸적 기반과 자연적, 사회적 기반을 중시하지만, 그러나 그의 인간공학적 방식은 자칫하면 또 다른 물질주의적 환원이 되어서 또 다른 전체주의적 일원론의 폭력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그의 시도와 같은 초월의 과도한 자연주의적 환원을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27

앞에서 밝힌 대로 정신적 인격주의자 베르댜예프는 슈타이너 ‘자유 발도르프 학교’정신도 일종의 자연주의적 범신론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그 슈타이너의 말을 더 들어보면, 그는 세계 제1차 대전의 끔찍함을 경험한 후 이후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서 심각한 정신적 공황 속에 빠진 인류 문명을 “인간이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로 적시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청년 세대를 위한 교육학 강의(『젊은이들이여 앎을 삶이 되도록 일깨우라-인류 발달에 관한 정신과학적 연구 결과』)에서 앞으로 인류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뢰에 방향을 맞추는 교육학”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28 그는 “우리를 싸늘하게 만들지 않고 신뢰로 가득 채우는 인간 인식”이야말로 바로 “미래 교육학의 핵심”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게 영적으로 다가가려는 욕구가 더이상 없고”, 모두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모두 서로 스쳐 지나가는” 심한 단절과 차가운 개인주의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학적인 교육의 길이고, 그것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지혜에 바탕한 ‘인지학(人智學)’의 교육이라고 강술한다.29

V. 관계(公)를 통해서 자라나는 인간 자유와 믿음(信)-퇴계 성학십도(聖學十圖)로부터 배우기

1. 이렇게 인간에게서 결코 땅의 자연이나 우주의 일부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 인간 ‘정신(性)’이고, 그 핵심을 ‘자유’라고 한다면 그 자유는 ‘관계(公)’를 통해서 길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이 관계에서 주체적으로 ‘사이’를 만들어 내고, 그 사이를 지속적으로 선하게 밀고 나가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말로 하면 그 능력이란 서로 ‘믿을 수 있는 능력(信/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 밀고 나가는 힘인 믿음이 어떤 구체적인 행위력도 가져오지 못하는 허황된 관념의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다 구체적이고, 몸적이며, 일상적인 지속적 관계를 통해서 길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기서의 인간 정신(영)의 자유와 판단력이 한없이 공허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 차원뿐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어떻게든 이루려고 하는 ‘면역력’이라는 것도 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타자(the other)를 내 안으로 받아들여서 처음의 갈등과 고통을 견뎌내고 그 타자와 하나가 되어서 서로 도우면서 공생하는 관계와 사이를 창조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마침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생명은 결코 자체 안에 폐쇄된 부동자가 아니라 ‘관계’와 ‘호흡’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동안 나름의 장소와 집을 얻어서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지만, 그 일원인 인간(人/我) 생명이 다른 생명체의 집을 마구잡이로 흔들고 옮겨서는(移)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 ‘적절한 사이’를 두고서 함께 ‘존중하는 관계(敬)’로 살아야 하는 생명들이 부닥친 것이며, 그 사이의 신뢰가 깨진 것이 오늘의 팬데믹 현실이고,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면역력’이고 ‘백신’이라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1568년) 퇴계 선생은 조선 중기 극심한 사화(士禍) 여파 속에서 얻은 자신 학문의 결정판을 ‘성학십도聖學十圖’로 엮어서 중종과 인종, 명종에 이어 막 왕위에 오른 선조를 위해서 바쳤다. 당시는 이웃 왜구가 점점 더 잦은 침입으로 분란을 일으키던 때였고, 조선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임진왜란 20여 년 전의 어려울 때였다. 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여는 서언에서 그는 밝히기를, “하물며 임금의 마음은 온갖 일이 말미암은 바요,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요, 뭇 욕구들이 서로 공격하고 뭇 사특함들이 번갈아 뚫고자 하는 곳입니다. 한 번 태만하여 소홀해지고 방종이 계속되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치는 것같이 될 것이니,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바로 당시의 삶에서 “임금(人主)”과 그 “마음(一心)”이야말로 모든 일이 거기서 비롯되고, 만약 그것이 잘못 작동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치는”팬데믹의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30

본인은 여기에서 퇴계 선생이 지적하신 “임금의 마음(人主一心)”이라는 것을 오늘 21세기 문명적 상황에서 각 개인적 삶에서 보면, 바로 우리 ‘마음’과 ‘정신’을 말하는 것이고, 지구 생명 공동체 차원에서는 뭇 생명체 가운데서 ‘인간’ 마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즉 어떠한 생물학적, 신체적 병보다도 우리 ‘정신(心/靈)’과 ‘사유하는 힘(思)’과 ‘상상력(想)’이 부패하는 것이 더욱 심각한 위기라는 것이고, 오늘 전 지구적인 코로나 팬데믹은 바로 부패한 인간 마음으로 인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해 준다는 이해이다. 그러므로 그처럼 ‘임금의 마음’, ‘인간의 마음’, ‘나의 마음(吾心)’이 관건이므로 그것을 고치는 “성학의 큰 단서(聖學有大端)”와 “심법의 지극한 요체(心法有至要)”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고, 그것이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이고, “덕을 쌓는 기초(積德之基)”라고 가르치신 것이다.31

퇴계 선생은 이상과 같은 서문과 함께 임금과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성인(聖人)’의 마음이 되도록 하는 요체로 10가지의 가르침을 밝힌다. 먼저 제1도(圖) ‘태극도(太極圖)’와 제2도 ‘서명도(西銘圖)’에서 ‘세상 만물의 탄생(萬物化生)’과 ‘그 모든 하나됨(理一分殊)’의 가르침을 내어놓는다. 그런 후 바로 그와 같은 본래성에 대한 체득을 “구인(求仁)”, 사랑과 인간성을 찾고 실천하는 일에서 가능해진다고 밝히며, 그 일은 따로 멀리 이론이나 저세상의 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3도인 ‘소학도(小學圖)’가 지시하는 대로 아침 인사나 청소와 같은 지극한 인간 일상의 일, 음식과 의복에 관한 몸의 일, 친구 사이의 교제나 어른과 부모 공경 등의 가까운 인간관계의 일과 몸 예절과 음악, 글쓰기와 산수 등 참으로 기초적이고 일상적인 가르침을 중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신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가족과 마을의 일, 세대 간의 이어짐의 일을 잘하는 것 속에 공부가 먼저 놓여있음을 알아야 ‘인간성’, 仁을 행하는 공부가 낯설지 않고 친숙하며, 당시의 세대가 깊이 빠져있는 “인물위기지병(認物爲己之病)”, 세상을 자기로 아는 자기소외와 다시 세계를 진지하게 인정하지 않는 세계소외가 되는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32 오늘의 언어로 하면, 구체적인 몸의 경험과 삶의 실제 속에서 실천적인 과제와 대상과의 긴밀한 만남과 관계에서 얻어진 배움이 없이는 거기서의 얻어진 지식이나 학식이란 단지 관념적인 이기주의의 도구가 되고,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적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침인 것이다.33

본인은 이러한 방향이 위에서 한국 ‘신학(信學)’으로서 이야기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서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인격, 만나는 대상과 진정으로 교류하면서 그의 내면과 본질과 진실에 가닿을 수 있는 ‘정신력’과 영적 자유함을 기르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성장과 교육에서 ‘집’과 ‘가정’, ‘모성’의 차원이 새롭게 회복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 모성이나 가족, 집의 강조가 예전 가부장주의식 혈연중심의 그것을 다시 불러오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러한 인습적인 성(sex) 구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 그러나 인간 삶에서의 정신의 열림과 비상을 위해서는 여전히 긴요한 물리적 토대로 작용하는 ‘뿌리’와 ‘고향’과 ‘집’을 인간다운 공동체삶의 앞날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는 토대로 보면서 지구상의 생명 누구에게나 그것을 보장해 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특히 생명이 어릴수록 그것이 긴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물음은 좁은 교육환경의 물음을 넘어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사항으로서 ‘기본소득제’에 근거한 삶의 안정화, 모성과 돌봄의 공공화 및 탈성별화와 더불어 획기적인 주거 안정, 더욱 혁신적으로 확충되는 지방자치제와 함께 하는 교육과 일자리의 ‘디지컬라이제이션(디지털화+지역화)’ 등이 함께 따라주어야 한다고 본다.34

오늘 한국 교육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지방대학의 공동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어떠한 다른 처방책보다도 각 고장과 지역에서 자라서 그곳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집과 고향으로 느끼는 세대의 성장 없이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인간이 여전히 몸으로서 이 지구에서 사는 한, 가상의 플랫폼만으로는 되지 않으며, 그렇게는 결코 편안하고 행복할 수 없고, 그러한 경우 모든 삶과 생명을 마침내는 왜곡된 자아의 독재적 파국으로 이끄는 자아 전체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즉 인간 자체이기도 하고, 생명 자체이기도 한 ‘관계와 사이(仁者人也)’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고, 거기에 반해서 수운 최제우 선생도 말씀하셨듯이 ‘시천주(侍天主)’의 진실이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각 옮길 수 없는 고유한 장소와 중심임을 아는 것(各知不移者也)’이라고 하였다면,35 그 각 장소에 대한 존귀함을 아는 일이 정치와 교육 실행의 기초가 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유사란 맥락에서 『논어』의 첫 ‘학이’(學而)편에 나와 있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반드시 배웠다고 말하겠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고 한 말씀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즉 ‘학(學)’, 학문과 배움과 교육의 참 목표는 바로 인격의 ‘신실함(信)’, ‘믿을 수 있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 학업의 진정한 잣대는 바로 ‘信’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듯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대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한국 신학(信學)’은 동시에 종교학(神學·聖學)이기도 하고, 인간학(性學·仁學)이기도 하며, 그러나 동시에 정치와 교육, 문화(誠學) 등을 함께 아우르는 ‘믿음을 위한 통합학문(Integral Studies for Faith)’으로서의 교육학이 되는 것을 밝혀준다는 의미이다.

3. 퇴계 선생은 그의 『성학십도』 서문에서 맹자의 유명한 말, “마음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를 가져온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이 비록 한 치 사방(方寸) 크기에 불과하지만, 매우 텅 비고 신령하여서(至虛至靈) 집중하여 사려를 밝히면(思曰睿) 뚜렷하고 알찬 진리(理)를 얻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강조하신다. 이와 동시에 공자의 가르침인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씀을 가져와서 ‘생각(思)’과 ‘배움(學)’이라는 두 가지 공부를 함께 하되 이 두 가지 공부 모두에 긴요한 것이 전일적 집중의 “경(敬)”이라는 것을 밝히신다. 이렇게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學問辨別)” 공부를 통해서 진리를 구하는 일을 누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때와 장소에서라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이 아는 마음의 세미한 기미에 대해서 성찰하는 일과 더불어 지속해나갈 때 “덕행이 일상의 윤리를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천인합일의 오묘함(天人合一之妙斯得)”을 여기서 얻을 수 있고, “성인(聖人)이 되는 요령(作聖之要)”과 “근본을 바로 잡아 정치를 경륜하는 근원(端本出治之源)”도 모두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36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여기서 퇴계 선생은 깊은 초월적 영성과 신앙, 학문과 교육과 정치가 어떻게 하나로 어우러져 관계되는지를 잘 밝힌 것이라 여기고, 그에게는 오늘 우리에게는 서로 나누어져 있는 이상의 것들이 결코 서로 상관없는 다른 일이 아니고, 궁극의 큰 하나 됨(天人合一)을 향한 길에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실행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한결같은 일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와 세상에서의 관계의 일이란 바로 그러한 일을 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하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과 정치, 종교와 일상, 사고와 실천, 개인과 공동체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긴밀히 함께 가며, 그 일이 바로 누구나의 ‘마음(心)’으로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 ‘마음(정신)’의 활동인 ‘생각하는 일(思)’이 그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며,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세상(物)에 대해서, 진리(理)에 대해서, 하늘(靈臺)에 대해서 깊은 존숭감(敬)을 가지고 간단없이 다가가고자 하는 지속하는 일(誠)을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서 그 하늘과 진리도 우리에게 다가온다는(理到) 큰 믿음을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서구 종교의 절대주의적 계시 신앙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사유력에 대해서 깊은 신뢰를 가지는 것이며, 그래서 ‘학문’과 ‘종교’, 위의 퇴계 선생의 언어로 하면 ‘공부(學)’와 ‘생각(思)’이 함께 가는 것이고, 서구 대안적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용어로 하면 ‘활동적 삶(vita activa)’과 ‘성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분열이 극복되면서 참된 인간적인 ‘정신적 삶(the life of the mind)’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7

본인은 오늘의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서 한국 젊은이들, 특히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의 절망과 좌절이 결코 그들이 지금까지 받아온 오랜 기간의 학습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오랜 기간의 공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공부하는지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깊게 사유해 보지 못했고, 인간 정신과 마음의 진정한 힘에 관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며, 그렇게 오랜 시간 어렵게 밟아왔던 지적 수업(學)라는 것도 단지 표피적인 암기 수준에 머물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즉 진정으로 사유하고 변별하는 정신적 힘을 기르는 공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 파국 이후의 새로운 노멀을 찾는 중이다. 지금까지 노동하고 생산하는 인간으로서 삶의 결과가 오늘과 같은 좌절과 자기파괴라면, 그리고 그것을 계속할 때 쌓이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빈부격차이고, 못 가진 자의 절망과 비참, 극심해지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경쟁과 거기서의 혐오와 배제라면, 더는 그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래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우리 삶과 정치와 교육의 지향을 새롭게 해서 우리 ‘정신’과 ‘마음’에로 그 최우선의 관심을 돌려서 그것을 중심 주제로 삼아 서로 간의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긴밀히 연결되는 하나 됨의 네트워크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퇴계 선생이 “정치를 경륜하는 근원”, 오늘 우리의 이해로 하면, 각자 생업을 통해서 호구도 해결하고 공적 삶을 살 수 있는 연원도 바로 이 ‘마음’과 ‘정신 공부(大學, 큰 학문)’에 있다고 했다면, 이제 이 일에 몰두해 보는 것이 어떤가? 이 일이야말로 진정한 ‘초월적 면역’을 획득하는 길이 될 것이고, 일시적인 면역책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자살을 하거나 반생명적 방향으로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근원적인 방책을 찾아 나서는 일이 남아있음을 믿는 일일 것이다. 퇴계 선생은 이 일(大學圖)을 위해서 더욱 섬세하고 정치하게 우리 마음의 일, 감정과 의지와 참된 사유의 판별을 위한 세세한 길잡이를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와 ‘인설도(仁說圖)’, ‘심학도(心學圖)’와 ‘경재잠도(敬齋箴圖)’ 등으로 풀어냈고,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일에 보다 정진할 수 있도록 함께 모여 배우는 학문 공동체 삶의 규칙을 말하는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를 제시했으며, 이러한 일이 바로 우리 삶의 모든 일상이 되도록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로 마지막을 밝혔다. 그의 성학십도의 마무리로서 이른 아침부터 일과의 모든 경우에,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서도 우리 마음속의 지극한 선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경외(敬畏)’의 집중을 말씀하셨다. 이런 공부야말로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그들의 시대적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참다운 인간적 백신이고, 진정한 종교적 가르침이며,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위대한 배움의 길이라고 여긴다.

VI. 참된 초월적 백신으로서의 ‘한국 인학(仁學)’과 언어(言)

퇴계 선생은 그의 ‘성학십도’ 제7도를 ‘인설도(仁說圖)’로 제시하면서 우리 존재의 초월적 근거인 마음과 정신(理, spirit)의 으뜸 원리로서 ‘인(仁)’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 설명을 『중용』과 주자의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이라는 언어를 가져와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마음으로 삼은 것”이고, “생명의 본성(生之性)”이며, “사랑의 원리(愛之理)”라고 밝혔다.38 그것이 우리 마음의 행위력인 ‘덕(德)’이나 ‘도(道)’로도 표현되는데, 그 이전의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는 인간 마음의 본체(理)와 그 감정적 나타남(氣)을 5가지 항목으로 드는바, ‘仁·禮·義·智·信’이 그것이다. 여기서 仁 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야말로 그러한 모든 덕의 출발점이고, 근원이며, 그 모든 것을 포괄하고 관통하는 으뜸 원리와 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언어로 하면 우리가 정신과 마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면역력이 바로 이 仁이라는 사랑의 생명력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맥락에서 퇴계 선생도 그 인설도 설명의 마지막에 옛 제왕들의 가장 큰 공부(大學)가 이 “仁에 머무는 것(止於仁)”이었고, 그리하여 우리 공부가 전심을 다 해서 “인을 체득하는 묘법(體仁之妙)”을 구하는(求仁) 공부여야 함을 역설하였다.39

19세기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청일전쟁 등을 겪으며 점점 몰락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동아시아 유가 전통의 핵심 언어인 그 仁을 새롭게 밝혀 갈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인학(仁學)”을 말하며, 거기서 그는 仁이라는 글자가 두 ‘이(二)’ 자(字)와 사람 ‘인(人)’ 자가 모여서 된 글자임을 지적하며 가장 중요한 뜻이 ‘통(通)’이라고 밝혔다. 또한 仁 자가 시작을 말하는 ‘元(원)’이나 없음의 ‘无(무)’와도 상통하는 동일한 구성의 글자임을 역설하며 이 세 글자가 모두 존재의 ‘근본’을 지시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퇴계 선생이 ‘仁·禮·義·智·信’ 또는 ‘仁·義·禮·智’라고 밝힌 인간 마음의 다섯 가지, 혹은 네 가지의 원리와 덕목을 설명하는 글(心統性情圖)에는 仁의 ‘애지리(愛之理)’인 측은과 사랑의 원리와 禮의 ‘경지리(敬之理)’인 사양과 겸양의 원리, ‘의지리(宜之理)’인 義의 부끄러움의 원리, ‘별지리(別之理)’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원리인 智와 더불어 그 마무리인 ‘실지리(實之理)’로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실(誠實)의 信이 있다. 이 다섯 가지의 나열이나 순서, 또는 그 설명의 언어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지만, 여기서 본인에게 ‘信’이라는 덕목이 ‘實之理’와 ‘성실지심(誠實之心)’으로 표현된 것이 특히 다가왔다.

信이라는 글자가 인간의 ‘人’ 자와 그 언어의 ‘言’ 자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글자라는 것도 시선을 끄는 것이거니와, 그것은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모든 예와 의의 판단을 끝까지 고수하여서 마침내 인간성(仁)과 세상의 만물 속에서 표현되는 초월(性·理)의 거룩(聖)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내는 실천적 힘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제7도 ‘인설도’에서 퇴계 선생이 모든 창조와 생명, 사랑의 원리인 仁을 체득하는 방법이 다시 “공(公)”, 즉 ‘관계’와 ‘사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면(“公者 所以體仁 猶言克己復禮爲仁也”),41 信이라는 글자 구성은 다시 인간의 관계 맺음에서 ‘언어(言)’가 중요하고, 인간은 그 언어를 통해서 사유하고 상상하며 미래를 마련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한 인간 삶의 반경에서 언어가 부패해 있고, 그것을 잘 배우지 못하며, 또한 그 말의 약속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지켜지는 경험을 잘 하지 못할 때, 그의 인간적인 사고력과 행위력, 실천력은 길러지기 어렵고, 미래에 대한 상상과 희망과 소망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信’이라는 덕목을 ‘實’와 ‘誠’의 이치와 덕목으로 푼 것은 탁월하고, 여기서 그 信의 원리라고 밝힌 ‘誠’이라는 글자가 다시 ‘인간의 말과 생각, 상상(言)’을 ‘실제로 성취해 내는(成)’ 인간 정신의 힘(誠)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그 誠이 곧 하늘의 도(誠者 天之道也)”이기도 하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길(誠之者 人之道也)”이라고 가르치는 『중용』 20장의 메시지는 오늘 팬데믹 이후에 우리 종교와 교육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잘 밝혀준다.

오늘 한국 교육에서 언어교육이 얼마나 파행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지적은 새롭지 않다. 한나 아렌트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일찍이 주장한 이반 일리치와 같은 인류 문명의 대안 사상가들도 한결같이 강조하듯이 마지막 남는 것은 우리의 ‘언어(language)’이다. 그래서 인간의 나아갈 길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리 언어 속에 담겨 전해지는 과거 인간성의 흔적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고, 그것을 상고(詳考)하여 그 언어로부터 지혜를 얻어서 현재를 갱신하며 미래의 시간을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긴요한 인간적인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어쩌면 상투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능력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고, 공자도 그런 맥락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바로 “스승(師)”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42 그런데도 오늘 우리 삶과 교육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의 모국어 형성 기회가 박탈되고 있고, 그에 비례해서 어린이 언어치료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 오늘 한국의 정황이다. 세종대왕 덕분에 한국인들의 문맹률은 1% 이하로 낮지만, 공동체 구성원 서로 간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상식과 사고가 역할을 하면서 함께 공동체의 미래를 구상하고 희망하게 하는 ‘문해력(literacy)’은 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라는 지적은 우리의 언어생활이 얼마나 부패해져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43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학교 교육에서의 국어교육이나 독서교육, 인문교육 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더욱더 근원적으로 앞에서 우리가 성찰한 인간 공동체 삶에서의 각종 불의(不義)와 불인(不仁)이 그 밑바닥에 있을 것인데, 특히 종교와 정치, 검찰과 언론, 스승과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불의와 무사유(無思惟)의 악이 있고, 그들의 언어가 진실 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면서 거짓된 의견으로 사실과 진실을 흐리는 일이 가중되면서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가, 특히 자라나는 세대가 그 인식의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진실이 흔들리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44 이런 가운데서 우리 언어와 말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한글이 지닌 하늘의 뜻을 밝혀내어 전하는 일에 몰두한 한국 통합적 종교 사상가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 선생은 ‘믿음(信)’이라는 언어와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매우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앞에서 퇴계 선생의 이해와 많은 연결점이 있는 것을 보는데, 그는 ‘믿음(信)’이란 ‘민다(推)’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서 그것은 곧 위에 계신 하느님을 향해서 ‘자신을 밀어 올린다’라는 뜻으로서 “자기 생각을 밀고 밀어서 그것이 툭 터질 때 비로소 믿음(信)이 생길 수 있다”라고 보았다.45 소리글자 한글의 ‘믿음’이라는 말소리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해석이다. 이러한 성찰은 퇴계 선생이 위에서 ‘信’을 ‘實之理’와 ‘誠實’의 마음으로 푼 것과도 매우 상통한다. 또한 ‘글’과 ‘그리스도’라는 한글 소리로부터 다석은 “글은 말 그대로 글이자 그리스도”이고, “글을 그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성찰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 내지는 종교에서 탈각된 인간 사유적 성찰이 왜 중요한지를 잘 밝혀주고, 동시에 오늘의 교육, 인간 교육과 학교 교육이 그 잃어버린 초월적 차원을 회복하여 다시 진정한 인간교육으로 거듭나는 일이 어떻게 긴박한지를 밝혀준다.

VII. 마무리하는 말-참된 ‘인간세(人間世, Anthropocene)’의 시작과 한국 종교교육

오늘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학교 교육이 크게 요동을 치며 여기서 우리가 제일 많이 듣는 염려는 ‘아이들의 학력이 떨어진다’, ‘부모 경제력에 따라서 아이들 학력 차이가 심해진다’, ‘학교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배우는 함께 사는 능력을 배우지 못한다’ 등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이러한 코로나 상황이 발생하기 전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많은 지적은 ‘교실붕괴’였고, 그래서 ‘탈학교’를 말했으며, 극심한 입시경쟁교육의 고통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그들의 인성과 지성, 체력이 그 많은 자원의 쏟아부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거기서 아이들의 많은 시간이 온갖 저질의 가상세계에 쏟아부어 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염려했었다. 그렇다면 이제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교육이 나아갈 방향은 결코 다시 이러한 문제점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서 그것을 그저 ‘회복’하자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단순히 학력만 염려하고, 경제 제일주의 관점에서만 아이들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지금까지 주로 행해왔던 그러한 모든 것들이 많은 한계와 오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단순한 노말의 회복이 아닌 ‘새로운 노말’, 단순 회복이 아닌 ‘초(超)회복’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46

한국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실체론적으로, 탈지성과 반지성으로, 초형이상학적으로 독점화하면서 오늘의 부패를 불러왔고, 그에 대한 치유의 한 방편으로서 여기서 특히 동아시아 신유교 전통의 ‘경학적(經學的/敬學的)’ 내재 영성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훨씬 더 보편적으로 초월과 거룩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특히 서구 근대식 교육에서 나누어져 있던 종교와 교육, 신앙과 사유의 영역을 더욱 긴밀히 연결할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러한 초월의 내재화가 불러오는 사각지대도 또한 있다. 그것은 자칫하면 과격한 인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환원이 되어서 초월과 내재, 신과 인간, 정신과 몸 등의 이원적 긴장성이 해소되고, 초월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훼손되어 오늘날처럼 특히 물질주의와 그와 연결된 자연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는 인간성 내지는 인간 정신성 자체가 다시 단지 세상과 자연의 산물로만 절하되면서 인권의 마지막 보루가 흔들리는 경우를 맞이할 수 있다. 철저히 탈종교화된 유교나 유물론적 마르크시즘이 불러오는 재앙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각자 이렇게 나름의 사각지대를 가지는 동서의 두 종교 전통을 어떻게 서로 관계시키고 통전시켜서 오늘 큰 위기에 빠진 지구 생명 삶을 위해서 보다 열려진 공통의 새길을 찾는가가 긴요하다. 그러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항목 하나는 ‘종교’와 ‘교육’,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보듬고, 연결하고, 서로 보완하고 자극이 되는 관계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본인은 우주 문명사적으로 과거의 ‘천동설(天動說)’이나 ‘지동설(地動說)’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 ‘각자가 태양을 자기 속에 가져오는 일인 ‘인동설(人動說)’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일이라고도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각자의 인격과 정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을 깨달으면서도 부단히 자기를 초극하고 초월하는 인간 정신을 토대로 천지를 하나의 큰 우주적 가족으로 보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47 이것은 오늘의 서양 생태학이 인간이 온 지구 생태계를 과도하게 점령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불의한 인간중심주의와 경제 제일주의적인 자본세로서의 ‘인간세(人類世, Anthrocene)’가 아닌 우주에서의 인간의 진정한 역할과 위치를 회복하고, 거기서의 인간 정신의 참된 뜻을 다시 자각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제 본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은 예전 퇴계 선생이 ‘성학십도’를 지어 선조에게 바치며 마무리로 언급하셨던 “근포지성(芹曝之誠)”, “미나리와 햇볕을 올리는 정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미나리’나 ‘햇볕’처럼 하찮고 평범한 것을 바치지만 그 정성만은 보아주시라는 겸허하고 간곡한 표현이었다고 하는데,48 본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얼마 전 재미 영화감독 정이삭과 윤여정의 영화 <미나리>에서 ‘미나리’가 소박하고 바로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것으로서 큰 역할을 했듯이 그렇게 소박하고 평범한 것이 진정 온 생명을 살리는 기초가 됨을 지시하는 의미로 생각해 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해서 한국 종교 교육학이 그러한 진실들을 더욱 밝혀주는 ‘사유(思)’와 ‘믿음(信)’의 학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요약

본 논문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사회와 인류 문명의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의미로 특히 종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고서 어떠한 뉴노말의 삶이 가능한지를 탐색한다. 오늘 21세기 인류 문명이 당면한 팬데믹 현실이 있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종교 사고는 서구 유대·기독교였다. 그것은 특히 인류 근대 이후 그러한데,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동아시아적 내재 종교 영성을 불러온다. 그중에서도 한국신유교 사상가 퇴계 선생의 인간과 세계 이해가 ‘오래된 미래’로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아서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오늘의 독일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공학(Anthropotechnik)’과 대비시키면서 팬데믹 이후 한국 종교와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여기서 본 논문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더는 어떤 외면적인 초월자(神) 이름을 어떻게 정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그러한 초월의 실제를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여기 지금의 한계를 넘어서 어떤 더 높은 초월이 있다고 믿는지의 인간 인식과 믿음의 문제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에 대한 탐색을 한국 ‘신학(信學)’과 ‘인학(仁學)’의 이름으로 살핀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서로 나뉘어 있던 종교와 교육, 정치, 문화 등을 통합적으로 살피면서 그것이 하나의 ‘믿음을 위한 통합학문(Korean Integral Studies for Faith)’이 되어 코로나 이후 시대를 위한 ‘초월적 백신’으로 역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주제어

코로나 팬데믹, 종교, 교육, 한국 信學, 한국 仁學, 인간공학, 퇴계 성학십도

Endnote

1 앤드루 류,「‘중국 바이러스’, 그리고 세계시장」, 백영서 엮음, 『팬데믹 이후 중국의 길을 묻다』(서울: 책과함께, 2021), 113쪽.

2 <재난 앞에서 소리없이 꽃들이 진다>, 《시사 IN》, Vol. 654, 2020년 3월 31일자.

3 앤드루 류, 앞의 글, 117쪽.

4 조지프 스티글리츠, 『불만시대의 자본주의: 공정한 경제는 불가능한가』, 박세연 옮김(서울: 열린 책들, 2021), 38쪽 이하.

5 아오양, 「탈중국화와 중국의 대응」, 백영서 엮음, 앞의 책, 179쪽.

6 이은선,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서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5), 26쪽.

7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윤리적 노하우-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 유권종, 박충식 옮김(서울: 갈무리, 2009), 77쪽 이하; 이은선, 「세월호 이후의 한국 교육-지성·인성·영성의 통섭에 대하여」,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교육철학』(서울: 동연, 2018), 292쪽 이하.

8 이은선, 「해학 이기의 신인(神人/眞君) 의식과 동북아 평화」, 『儒學硏究』, 제50집(충남: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0.2), 186쪽; 이은선,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서울: 동연, 2020), 239쪽 이하.

9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서울: 교육과학사, 2018), 292쪽.

10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서울: 늘봄, 2015), 27-28쪽.

11 위의 책, 42쪽.

1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서울: 한길사, 2001), 300쪽.

13 이신,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서울: 동연, 2011), 300쪽 이하.

14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앞의 책, 44쪽.

15 여기서 본인이 몸과 혼과 영을 한자의 표현으로 ‘身·氣·心’이나 ’精·命·性’으로 병기한 것은 본인이 가장 오래된 한국적인 사고가 드러나 있다고 여기는 한국 대종교(大倧敎)의 인간 이해와 초월 이해를 가져와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 대응과 비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큰 주제가 되므로 단지 여기서는 한국 信學과 仁學이 중시여기는 전통에서 가져왔다는 것만을 밝히며 상세한 성찰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이은선, 「3·1운동 정신에서의 유교(대종교)와 기독교」, 변선환 아키브 편, 『3·1정신과 ‘以後’기독교』(서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9), 45쪽 이하.

16 이은선,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서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20), 8쪽 이하.

17 페터 슬로터다이크,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문순표 옮김(서울: 오월의 봄, 2020); 이은선, 「참된 인격주의와 휴머니즘의 차이는 무엇인가」, 에큐메니안, ’사유와 信學’5, (2021.04.04.)

18 페터 슬로터다이크, 앞의 책, 18쪽.

19 위의 책, 142쪽.

20 위의 책, 53쪽.

21 위의 책, 334, 378쪽.

22 위의 책, 94쪽.

23 위의 책, 525, 619쪽.

24 이은선, 「종교문화적 다원성과 한국 여성신학」,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종교聖·여성性·정치誠의 한몸짜기』(서울: 모시는사람들, 2011), 29쪽 이하.

25 페터 슬로터다이크, 앞의 책, 707쪽 이하.

26 위의 책, 697, 699쪽.

27 니콜라이 A. 베르댜예프, 앞의 책, 45쪽 이하; 이은선, 「왜 오늘 다시 인격인가?-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에큐메니안, ‘사유와 信學’4, (2021.03.21.)

28 루돌프 슈타이너, 『젊은이여, 앎을 삶이 되도록 일깨우라-인류 발달에 관한 정신과학적 연구 결과』, 최혜경 옮김, (서울: 밝은누리, 2013), 134-137쪽.

29 위의 책, 198쪽; 이은선, 「믿음(信), 교육정의의 핵심과 한국공동체 삶의 미래」, 김일수 외, 『한국사회 정의 바로세우기』(서울: 세창미디어, 2015), 177-219쪽.

30 이황, 『성학십도』, 이광호 옮김(서울: 홍익출판사, 2001), 15-16쪽.

31 위의 책, 161쪽.

32 위의 책, 171쪽.

33 마리 루이제 크노트, 『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 배기정·김송인 옮김(서울: 산지니, 2016), 90쪽; 이은선, 「믿음(信), 교육정의의 핵심과 한국 공동체 삶의 미래」, 김일수 외, 앞의 책. 205쪽 이하.

34 이원재, 최영준, 위의 책, 54쪽 이하.

35 이찬석, 「어디로? 코로나 19속으로!」, 『샘』제45호(2020.12), 12쪽.

36 이황, 앞의 책, 27-28쪽.

37 이은선,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사상」,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117쪽 이하.

38 이황, 앞의 책, 83쪽.

39 위의 책, 189쪽.

40 담사동, 『인학仁學』, 임형석 옮김(서울: 산지니, 2016), 11쪽 이하; 이은선, 「왜 오늘 다시 인격인가?-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에큐메니안, ‘사유와 信學’4, (2021.03.21.).

41 이황, 앞의 책, 188쪽.

42 『논어』, 「위정(爲政)」 11.

43 <정희진의 융합 23>, 《한겨레 신문》, 2021년 5월 11일자.

44 이은선, 「사실적 진리와 정의 그리고 용서의 관계에 대하여」,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서울: 동연, 2018), 54쪽.

45 이정배, 『유영모의 귀일신학歸一神學』(서울: 밀알북스, 2020), 42-43쪽.

46 이원재, 최영준,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서울: 어크로스, 2021), 7쪽.

47 이은선, 「왜 오늘 다시 인격인가?-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에큐메니안, ‘사유와 信學’4. (2021.03.21.).

48 이황, 앞의 책, 28쪽.

References

1 이황(李滉),『성학십도』, 이광호 옮김, 서울: 홍익출판사, 2001.  

2 김일수 외,『한국사회 정의 바로세우기』, 서울: 세차미디어, 2015.  

3 권오봉,『퇴계 선생 일대기』, 서울: 교육과학사, 2018.  

4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서울: 늘봄, 2015.  

5 담사동,『인학仁學』, 임형석 옮김, 서울: 산지니, 2016.  

6 루돌프 슈타이너,『젊은이여, 앎을 삶이 되도록 일깨우라-인류 발달에 관한 정신과학적 연구 결과』, 최혜경 옮김, 서울: 밝은누리, 2013.  

7 마리 루이제 크노트,『탈학습, 한나 아렌트의 사유방식』, 배기정·김송인 옮김, 서울: 산지니, 2016.  

8 백영서 엮음,『팬데믹 이후 중국의 길을 묻다』, 서울: 책과함께, 2021.  

9 이신 지음,『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 서울: 동연, 2011.  

10 이원재, 최영준『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서울: 어크로스, 2021.  

11 이은선,『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서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20.  

12 _____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서울: 동연, 2020.  

13 _____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교육철학』, 서울: 동연, 2018.  

14 _____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서울: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5.  

15 _____ ,「해학 이기의 신인(神人/眞君) 의식과 동북아 평화」, 『儒學硏究』제50집, 충남: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0.02.  

16 이정배,『유영모의 귀일신학歸一神學』, 서울: 밀알북스, 2020.  

17 이찬석,「어디로? 코로나 19속으로!」, 『샘』 제45호(2020.12).  

18 조지프 스티글리츠,『불만시대의 자본주의: 공정한 경제는 불가능한가』, 박세연 옮김, 서울: 열린 책들, 2021.  

19 페터 슬로터다이크,『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문순표 옮김, 서울: 오월의 봄, 2020.  

20 프란시스코 J. 바렐라,『윤리적 노하우-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 유권종, 박충식 옮김, 서울: 갈무리, 2009.  

21 한나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 1,2』, 이진우·박미애 옮김, 서울: 한길사, 2006.  

22 ________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서울: 한길사, 2001.  

23 이은선,「왜 오늘 다시 인격인가?-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에큐메니안, ‘사유와 信學’4, (2021.03.21.)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90”  

24 <정희진의 융합 23>, 《한겨레 신문》, 2021년 5월 11일자.  

25 <재난 앞에서 소리없이 꽃들이 진다>, 《시사 IN》, Vol. 654, 2020년 3월 31일자,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