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The Process of The Human Formation of The Four Steps toward Enlightenment(四果) as The Practice in Buddhism and Its Educational Significances : In Comparison with John Dewey’s Educational Empiricism

Research
이 송곤  Songgon Lee1*

Abstract

From the viewpoint of the educational experience,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process of the human formation of ‘The Four Steps for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四果)’, that is The Sotāpanna(須陀洹), The Skadāgāmī(斯陀含), The Anāgāmī(阿那含), The Arahan(阿羅漢) in the early buddhism among buddhist history and thereby to suggest its educational significances.

First of all, as the comparative method for this, the writer used the principles of growth of education, its continuity, and its interaction in John Dewey.

Although there is no common denominator between the concept of The Four Steps of The Practice(bhāvanā) toward Enlightenment and that of Educational Experience in John Dewey, I tried to build a theory of human formation by educational experience in The Four Steps of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 by comparing that both, that is The Four Steps of The Practice by ‘interdependent theory(緣起法)’ appeared as logical structure in the former, which The Sotāpanna(須陀洹) as the first step for the practice succeed to accompany The Skadāgāmī(斯陀含) as the next step and continuously next to The Anāgāmī(阿那含) and continuously next to The Arahan(阿羅漢) and the ‘contunity’ for the growth of educational experience in the latter.

The comparative discussion between the two like this is possible. To put it concretely, because the concept of the vividly educational experience that progressed by continuity and growth in nature for John Dewey is built on the foundations of ‘the inter-connected relation of the whole situations(全體狀況의 相互連結)’ is roughly like that of the supreme educational experience at ‘The Four Steps of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 that the three poisonous mind, namely Greed(貪欲) · Anger(瞋恚), · Foolishness(痴闇), is totally disappeared through elimination of the ten fetters including Greed by The Hwanmyeolmun(還滅門 ; The gate of nibbāna through which one escape transmigration(輪迴) through successive extinction of anguishes based on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arising) progressing step by step from ‘all sentient beings(凡夫衆生)’ to ‘The Arahan', as the supreme state in ‘the world’. ‘The Four Steps of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 has revealed the Value of the buddhistic human formation by the comparative discussion like this. In addition, this Four Steps of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 is meaningfil in that appears epistemologic relation. Therefore, this ‘Four Steps for the practice toward Enlightenment’(四果) in the early buddhism has the educational significances for the human formation.

Keyword



Ⅰ. 서언

붓다가 도달한 최상의 경지인 니빠나(nibbāna), 즉 번뇌를 소멸한 후 도달한 열반의 경지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인간형성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초기불교는 이와 같이 최상의 인간형성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응공(應供), 즉 ‘마땅히 공양받을만한 자’를 뜻하는 아라한(arahant)이라고 표현하고 있다.1 아라한은 출가 수행자가 수행하는 네 가지 수행계위 가운데 최상위로서,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의 계위를 거쳐 도달하는 최상의 수행위(修行位)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계위의 수행위는 사과(四果)로 불려지고 있으며, 각 계위마다 열반을 향한 ‘인간형성’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즉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사과(四果)의 수행과정은 점진적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탐(貪)·진(嗔)·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이 없어지고, 종국적으로는 탐(貪)·진(嗔)·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이 완전히 멸하게 되는 ‘인간형성’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사과수행의 최종 목적지 아라한은 최상의 인간형성의 상태라는 점에서 불교의 교육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육목적인 아라한에 도달하기 위한 사과수행의 인간형성의 과정은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과수행의 교육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본고는 사과의 수행과정을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성장과 지속성의 이론과 비교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사과의 수행과정이 교육적 경험의 질(質)적 수준2이 낮은 범부에서 질적 수준이 높은 성자로 변화해 감으로써 종국에는 아라한이라고 하는 최상의 인간으로 형성하는 데 있어서 교육적 경험의 성장과 발달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와 함께 탐(貪)․진(嗔)․치(痴)의 삼독심(三毒心)을 벗어나 열반이라고 하는 최상의 인격을 성취하는 인간형성의 과정을 연기적(緣起的) 경험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규명하였다. 더불어 사과의 수행과정에는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론이 다루지 않고 있는 인식론적 과정3이 식(識)의 증장과 소멸로 나타나고 있어서 사과의 수행과정이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대안제시도 가능하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그러므로 사과의 수행과정은 불교교육의 목적인 ‘깨달은 인간의 형성’을 위한 이론적 모델 가운데 초기불교가 제시하는 불교교육의 인간형성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교육사상의 대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행연구를 보면 불교의 수행이론을 교육학 분야에서 다룬 시도가 있었고, 종교와 교육이 공히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점(김광민, 1988 : 103-104)에서 볼 때 사과의 수행과정은 교육이론으로 성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4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과와 관련하여 성립의 문제가 있다고 하는 학설5이 있으나 이 논문은 성립의 문제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는 문헌학적 연구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Ⅱ. 사과(四果)와 수행과정(修行過程)

1. 사과(四果)란 무엇인가?

붓다 재세시 비구, 비구니의 출가중(出家衆; Sāngha)이 붓다의 근본 교설에 따라서 수행하여 이루고자 했던 구경의 목적은 붓다처럼 연기법을 깨달아 아라한(Arahant)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아라한이라고 하는 최상의 이상적 인간이 되는 것은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수다원과(須陀洹果) ·사다함과(斯陀含果) ·아나함과(阿那含果) ·아라한과(阿羅漢果)의 네 가지 단계가 있었다.

이러한 네 가지 단계는 ‘사과(四果)’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제까지 범부였다가 처음으로 성자(聖者)가 되는 수다원과, 그 다음에 사다함과, 아나함과의 수행단계, 그리고 아라한과가 있다.

그러면 특색있고 단계별로 이루어지는 특성을 띠고 있는 사과를 경전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붓다는 출가 교단의 수행자가 닦는 사과에 대해서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시기를, “사문법(沙門法)과 사문과(沙門果)가 있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마땅히 너희를 위하여 설하리라. 어떤 것들이 사문법인가? 팔정도[八聖道]를 일컫는데, 정견(正見) 내지는 정정(正定)이다. 어떤 것들이 사문과인가?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를 말한다. 어떤 것들이 수다원과인가? 삼결[三結; 유신견(有身見), 의(疑),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끊음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사다함과인가? 삼결을 끊고 탐욕[貪]·성냄[恚]·어리석음[癡]이 엷어짐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아나함과인가? 오하분결 (五下分結; 다섯 가지 욕계에서의 번뇌)이 다함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아라한과인가?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고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말한다.”6

또한 같은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시기를, “네 가지 사문과(四沙門果)가 있다. 네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를 말한다. 수다원과란 어떤 것들인가? 세 가지 번뇌[三結]가 끊어짐을 일컬어 수다원과라고 명명한다. 사다함과란 어떤 것들인가? 세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짐을 사다함과라고 명명한다. 아나함과란 어떤 것들인가? 오하분결이 끊어짐을 일컬어 아나함과라고 명명한다. 아라한과란 어떤 것들인가? 만약 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성냄이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여,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면 이것을 아라한과라고 명명한다.”7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삼결(三結), 즉 세 가지 번뇌인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i)과 의(疑, vicikicchā), 그리고 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을 끊음으로서 얻게 되는 수행과위(修行果位)를 말한다. 수다원(須陀洹)은 빨리(Pāli)어로는 소따아빠나(Sotāpanna)로서 소따(Sota)는 Stream, 즉 흐름의 의미이며, 아아빠나(āpanna)는 흐름에 들어간 사람의 의미가 되는데 이 두 가지 의미가 합쳐진 말로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의미한다.8

세 가지 번뇌 가운데 첫 번째, 유신견(有身見)이란 5온(五蘊, The Five Aggregates ; khandhā)의 각각에 대해 네 가지 형태의 자아관념(自我觀念)을 고집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색(色, form ; rūpa. 형상, 색깔있는 것)을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것, 색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 자아 가운데 색이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색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수(受, feeling ; vedanā. 감각), 상(想, apperception ; saññā. 생각 또는 표상), 행(行, volitional activities ; samskāra. 의지와 행동) 식(識, cognizance ; vijñāna. 분별인식)도 마찬가지 경우이다.9 두 번째, 불(佛) · 법(法) · 승(僧), 계율(戒律),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회의(懷疑)하여 의심하는 것이 의(疑)이다.10 세 번째, 형식적 계율과 의례의식을 지켜서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계금취견(戒禁取見)이 된다11. 이와 같은 유신견과 의, 그리고 계금취견을 끊음으로서 출가한 수행자는 비로소 성자의 흐름의 첫 단계인 수다원과에 도달하게 된다.

수다원과의 다음 단계는 사다함과(斯陀含果)이다. 사다함은 빨리(Pāli)어로 사까다아가아민(Sakadāgāmin[sakad = sakid, + āgāmin.])으로서 이것은 한번 이상 이 땅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사람의 의미가 된다.12 앞의 수다원과에서 말하는 세 가지 번뇌인 삼결(三結)을 끊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진 상태에서 사다함의 과위(果位)에 이르게 된다.

수행자가 유신견과 의심과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인 세 가지 족쇄13에서 벗어나 비로소 성자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멀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사다함의 과위이다.

그 다음 과위인 아나함과(阿那含果)는 빨리(Pāli)어로는 아나아가아민(anāgāmin[an + āgāmin ])으로서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14을 의미한다. 오하분결(五下分結)15, 즉 탐욕, 성냄,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견해, 계에 대한 집착, 의심의 다섯 가지 욕계에서의 번뇌가 다함이 아나함과가 된다.

최종 단계는 아라한과(阿羅漢果)이다. 아라한(阿羅漢)은 빨리(Pāli)어로는 아라한트(Arahant)로서 니빠아나(nibbāna)라고 하는 최상의 경지를 얻은 사람16을 의미한다. 아라한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을 완전히 소멸한 성자로서 수행의 결실이자 완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17 다시 말해, 아라한과의 상태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고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말한다.

2. 사과(四果)의 수행과정

사과가 이와 같다면 사과 수행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잡아함경』에 보면 사념처(四念處)·오근(五根)이 사과를 이루기 위한 수행방법이 됨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시기를, “사념처(四念處)를 많이 닦아 익혀 사과라고 하는 네 가지 종류의 복과 이익이 되는 것을 얻게 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를 일컫는다”.18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시기를, “오근(五根)이 있다. 다섯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념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 을 일컫는다. 만약 비구가 이 오근(五根)을 실답게 잘 관찰하면 실답게 관찰하는 사람은 신견(身見)· 계취(戒取)·의(疑)라고 일컬어지는 세 가지 번뇌가 끊어짐을 알게 되는데 이것을 수다원이라고 명명한다.”19

비구는 사념처와 오근을 닦고 익혀서 수다원의 수행계위(修行階位)로부터 아라한의 수행계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념처와 오근을 닦아서 사과를 얻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수행해야 사과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인용경전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념처와 오근을 닦음으로써 사과를 얻는 방법이 초기경전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유기적(有機的)으로 되어 있지 않아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다행히 아비달마(阿毗達磨) 논서(論書)인 『잡아비담심론(雜阿毗曇心論)』에서는 5온(五蘊)은 깨끗하지 않은[不淨] 것인데 깨끗[淨]하다고 하고, 괴로운[苦] 것인데 즐겁다[樂]고 하고, 영원하지 않은데[無常] 영원하다[常]고 하고, 무아(無我)인데 ‘내가 있다’[我]고 하는 전도(顚倒 : 번뇌 때문에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된 중생의 네 가지 견해를 설명하면서, 사념처의 신념처(身念處) · 수념처(受念處) · 심념처(心念處) · 법념처(法念處)를 수행함으로써 네 가지 전도된 견해를 대치(對治)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20는 점에서, 우리는 사념처 수행을 통해 몸의 부정함[不淨]21과 함께 5온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고 괴로움[苦]인 것을 앎으로써 전도된 견해를 대치하고 결국에 가서는 사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과 가운데 성자위(聖者位)의 첫 번째 수행단계인 수다원을 증득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전도된 견해, 즉 번뇌 때문에 갖게 되는 잘못된 견해라고 할 수 있는데, 세 가지 족쇄(saṁyojana)22가 이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부터 세 가지 족쇄, 즉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심을 어떻게 끊어야 하고, 다음 수행과위를 향해 어떻게 닦아 나아가야 할지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세 가지 족쇄는 열 가지 족쇄에 속해 있음을 다음23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열반에 이르지 못한 인간의 상태인 열 가지 족쇄에 관한 초기불교 경전에 따른 분류는 ①감각적 욕망의 족쇄, ②색계(色界)의 존재에 관한 욕망의 족쇄, ③무색계(無色界)의 존재에 관한 욕망의 족쇄, ④적의(敵意)의 족쇄, ⑤자만의 족쇄, ⑥사견(邪見)의 족쇄, ⑦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 ⑧의심의 족쇄, ⑨들뜸의 족쇄, ⑩무명의 족쇄이다. 그런가 하면 열 가지 족쇄에 관한 남방 아비담마의 분류는 ①감각적 욕망의 족쇄, ②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 ③적의(敵意)의 족쇄 ④자만의 족쇄, ⑤사견(邪見)의 족쇄, ⑥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 ⑦의심의 족쇄, ⑧질투의 족쇄, ⑨인색의 족쇄, ⑩무명의 족쇄이다.

이상 예로 든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사견(邪見: 유신견이 여기에 해당한다)의 족쇄,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 의심의 족쇄 등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한 인간은 범부(凡夫)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족쇄의 유무에 따라 범부와 성자(聖者)로 가름된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족쇄는 사과의 수행체계에서 주목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뿍갈라빤냣띠, Puggala-paññatti』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이 범부인가? 범부는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그러한 현상들을 제거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범부라고 한다.”24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심 등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함으로써 범부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것은 유신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신견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다른 견해들이 전변(轉變)하는 현상이 있게 되는데,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유신견(有身見) 때문에 변집견(邊執見)이 전변(轉變)하고, 견취(見取)는 계금취견(戒禁取見)에 따라 전변(轉變)하며, 사견(邪見)은 의심에 따라 전변(轉變)한다.”25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범부가 전도(顚倒)된 견해의 원천(源泉)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견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앞에서 유신견에 대한 설명에서 밝혔듯이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등 5온이 무상(無常)함을 절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범부들은 왜 5온의 무상함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범부가 색 · 수 · 상 · 행 · 식 등 5온을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부가 5온을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색 · 수 · 상 · 행 · 식 등 다섯 가지에 욕탐(欲貪)이 있게 되어 발생하는 5취온(五取蘊) 때문이다. 붓다는 『잡아함경』에서 “색이 무상함을 관찰하여 여실히 아는 자는 색에 대한 욕탐을 끊어서 심해탈(心解脫)하며, 수 · 상 · 행 · 식도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라고26 설하고 있는데, 범부는 끊어야 할 욕탐을 끊지 못함으로써 색 · 수 · 상 · 행 · 식 등 5온을 취함으로써 이것들을 자신의 존재라고 집착하게 된다. 이때 5온을 취함은 5취온이 되는데, 취는 원어가 ‘upādāna’로서 그 의미가 연료이다. 그러므로 색 · 수 · 상 · 행 · 식 등 다섯 가지는 타는 연료가 되며, 또한 붙들고 놓지 않는 대상이 됨으로써 5취온이 되는 것27이고, 그런 점에서 욕탐으로 인해 발생하는 5취온 때문에 5온이 항상 존재한다고 전도(顚倒)함으로써 유신견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심 등 세 가지 족쇄를 끊기 어려운 이유가 5취온에 대한 집착에 있으며, 5취온은 욕탐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유신견의 발생의 원인이 되는 욕탐을 사념처 수행을 통해 끊음으로써 유신견에서 벗어나고, 또한 계금취견과 의심에서도 벗어남으로써 수다원의 과위에 들어가서 성자가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식 등 세 가지 족쇄를 끊은 다음에 사념처를 닦음으로써 욕탐과 성냄을 끊어서[五下分結을 끊음]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의 과위에 이르고, 종국에는 색계에 대한 탐욕[色貪], 무색계에 대한 탐욕[無色貪], 아만[慢], 가볍고 들뜬 상태(도거, 掉舉), 무명(無明) 등 다섯 가지 족쇄[五上分結]를 끊고 아라한과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심 등 세 가지 족쇄를 끊지 못하는 것도 5온이 항상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5취온에 의한 연생(緣生) 관계, 즉 인연에 의한 연기적 관계인 것이며, 이상 세 가지 족쇄를 끊음으로써 수다원에 이르고, 계속해서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이르는 것도 연생, 즉 이들 사이의 연기적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Ⅲ.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과 사과수행에서의 교육적 경험의 비교, 그리고 사과수행의 교육이론 정초

이제부터 사과의 수행과정에서의 교육적 경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논자는 사과 수행에서의 교육적 경험과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이론을 비교하고자 한다. 이렇게 양자를 비교하는 이유는 사과수행이 교육이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지속성 및 성장의 개념과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교육적 경험을 양자 비교를 통해 풀어나감으로써 사과 수행에 나타난 교육이론을 정초(定礎)하고자 한다.

존 듀이에 따르면28, 경험은 자연의, 자연에 있어서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자연에서 있게 된 경험, 즉 돌, 식물, 동물, 병, 건강, 온도, 전기, 등등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있게 된 경험이다.

존 듀이는 기존의 경험론의 사상가들과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자연과의 관계속에서 전개되는 경험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경험이론은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존재인 점에서 존 듀이는 이와 같이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경험주의적, 자연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29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존 듀이는 그리스의 플라톤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념론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는 그리스의 철학사상이 절대적인 실체인 이데아만을 상정함으로써 폐쇄된 세계관을 반영했다고 봄30으로써 관념론을 배격했던 것이다.

존 듀이의 경험에 관한 개념이 관념론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험론의 특성을 띠는 개념에 속하는 것인가? 존 로크와 같은 영국 경험론자들은 전통적인 철학에서 감각(Sense)과 사고(Thought), 경험(Experience)과 이성(Reason)을 엄격하게 구분함으로써, 경험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들 영국 경험론자들은 감각기관인 눈으로 빛깔과 모양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피부로 촉감을 느끼면서 경험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31 달리 표현하면, 이들 영국 경험론자들은 외부 대상에 대해 이루어진 감각소여(sense data)가 하나하나 낱낱의 형태로 감각되어 파악된 것32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존 듀이는 그의 저서에서 경험에 관해 많이 그리고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므로 존 로크가 주장한 경험론과 같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존 듀이의 경험에 관한 견해는 존 로크가 주장하는 경험론과 다르다. 영국의 경험론과 다른 존 듀이의 경험에 관한 견해는 교육철학자인 데이비드 덴튼의 견해를 통해 살펴보자. 데이비드 덴튼은 『교육에 있어서의 실존주의와 현상학』에서 베리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듀이는 합리적인 본성관을 다윈적인 자연 배경 속에 인간의 경험을 놓게 함으로써 분쇄하려고 했다. 인간은 초월적 정신, 합리적 실체, 인식론적인 주관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며, 확실히 지적(知的) 동물이지만. 자연의 모든 과정 속에 연루되어서 다른 모든 동물이 추구하는 것, 즉 자연환경(인간에 있어서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대한 성공적, 조화적인 적응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행동하는 자이지, 사고하는 자는 아니다. 즉 인간은 실천적인 존재이지, 이론적인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 제과정과 연속하고 있고, 인간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에 대처하고, 환경에 대하여 보다 훌륭한 적응을 확보하려고 할 적에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이다. 마음, 의식, 영혼-즉 듀이가 『도메거리』라고 부르는 낱말들-은, 자립하고 있는 실재(實在),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가를 표시하는 부차적인 것이다. 듀이는 합리주의자의 포괄적 우주를 풀려고 원할 적에는 제임스에 따르고 있었다.33

인용에 의하면, 존 듀이가 생각하는 경험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떠나있는 경험이 아니다. 즉 인간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연속하며 경험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실천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에 대처하고 환경에 적응할 때 도움을 주는 도구에 불과한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경험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인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의미한다.34

그런데 존 듀이의 경험은 유기체가 환경과의 상호관계속에서 있게 되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하는 활동은 분산시키며, 멀어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때문에 경험이 되지 못하므로 능동적으로 변화가 있게 하는 경험이 돼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변화가 있도록 하는 경험은 반드시 의미있는 결과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35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경험이란 예를 들면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은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신(全身)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고,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은 전신(全身)의 활동으로 듣는 것이라는 것이다.36 그러므로 존 듀이의 경험에 관한 개념은 전통적인 관념론과 경험론을 극복한 입장, 다시 말하면 반이원론(反二元論)의 입장에서 유기체가 자연과의 관련속에서 생동적으로 활동하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에 토대를 둔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개념은 유기체가 생동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경험의 개념이며, 이것은 지속성(continuity)과 상호작용(interaction), 그리고 성장(growth)의 원리로 특징지어진다.

먼저 상호작용(interaction)에 대해서 존 듀이는 “경험이란 언제나 개인이 당시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교변작용(交變作用)으로 인해 성립된다”37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작용은 상호작용으로서 경험의 주체인 유기체와 객체인 환경 사이에 서로 주고 받는 작용을 통해서 경험이 이루어지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38 존 듀이는 경험이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한 예로서 불속에 손가락을 넣은 아이를 들고 있다. 존 듀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험은 아이가 불속에 손가락을 넣음으로써 고통이 수반할 때 경험이 되는 것이지, 단지 불속에 손가락을 넣기만 하고 어떤 다른 행동의 결과가 느껴지지 못한다면 나무막대기가 타는 것과 같이 물질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39

그에 의하면 개개인은 환경적 요인과 힘들에 의해 무엇인가를 소극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할 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40

아이가 ‘손가락을 불에 넣은 것’은 경험이 이루어지는 환경이다. 이와 같이 경험이 이루어지는 환경, 다시 말해, 경험을 성립하게 만드는 환경에 대해 존 듀이는 다음에서 환경이 개개인인 우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하며, 경험의 원천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크게 보면, 현재 상태가 앞 세대의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행해 왔으며 전해진 것 때문이라는 점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들과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사실이 무시될 때 경험은 개개인의 몸과 마음 안에서 배타적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경험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일으키는 개개인의 밖에 원천이 있다.41

이상에서 볼 때 존 듀이가 말하는 상호작용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 간에 단절없이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상호관계에 의한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다.42 존 듀이는 이러한 의미의 상호작용을 유기체로서의 인간과 환경이라는 ‘상황 전체의 과정(process of the full situatio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43 여기에서 ‘상황 전체의 과정’이라는 것은 ‘듣는 것’이 없이는 ‘말하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읽는 것’이 없이는 ‘쓰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파는 것’이 없이는 ‘구입하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수요’가 없이는 ‘공급’이 있을 수 없는 것 등44을 의미하는데, 이들 말들이 각각 독립적이고 고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호작용에 의해 성립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45

존 듀이는 경험의 주체인 유기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적극적인 의지로서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을 상호작용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기체가 ‘상황 전체의 과정’ 속에서 ‘듣는 것’과 ‘말하는 것’과의 관계, ‘읽는 것’과 ‘쓰는 것’과의 관계, ‘파는 것과 ‘구입하는 것’과의 관계, ‘수요’와 ‘공급’과의 관계 등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교호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다음 존 듀이의 경험과 관련된 개념 가운데 중요한 개념으로는 지속성(continuity)의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앞에서 논한 상호작용(interaction)의 개념과 더불어 존 듀이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상호작용의 개념이 ‘공간적 통합 원리’라면, 지속성의 개념은 ‘시간적 통합 원리’라고46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의식의 내부에서 경험들 상호간에 연계성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존 듀이는 지속성에 대해서 “지속성의 원리는 앞에서 이루어진 경험에서 무엇인가를 취하고 뒤에 올 경험의 질(Quality)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47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연속적인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존 듀이는 또한 다음 인용에서 ‘교육은 경험의 재구성 또는 재조직’이라고48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는 지속성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경험의 재구성 또는 재조직으로서, 경험의 의미를 더해주고, 후속적으로 이어지는 다음 경험의 방향을 지시하는 능력을 증대시킨다. 경험의 의미가 증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활동들의 관련성과 연속성을 더 잘 지각한다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인용에서 지속성의 원리는 달리 표현하면, ‘지속적인 자기갱신(continuous self-renewal)으로서 이때 ‘지속적인 자기갱신’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적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49 그러므로 존 듀이가 언급하는 지속성은 교육적 경험을 성장하도록 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자는 존 듀이의 경험에 관한 견해와 그 특성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경험론은 사과수행과의 전체적인 비교에서 실제 삶에서 교육적 경험을 성장과 발달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즉 존 듀이의 교육이론이 실제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 교육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과 대비(對比)할 때, 사과의 수행과정은, 붓다가 삶과 분리(分離)된 형이상학적 경험에 토대를 두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생각이나 의식의 흐름(a stream of thought or consciousness)’을 경험으로 간주한 것50처럼, 무명에서 촉발(觸發)되는 의식의 흐름[行, saṅkhāra]에서 발생하는 욕탐을 끊음으로써 5온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이로써 유신견 등 세 가지 족쇄와 나머지 일곱 가지 족쇄를 끊은 후 아라한에 이르게 되는 생생한 체험의 모습을 삶의 과정속에서 성장과 발달의 양태(樣態)로 나타내고 있어서 양자는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부분적인 유사성도 발견되는데, 존 듀이가 경험을 상호작용 또는 교호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사과 수행이 인연에 의한 연기법의 상호관계로 환멸문을 지향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존 듀이가 말하는 지속성의 개념과 원리는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사과의 수행과정이 연기법의 연속성[緣生法]의 특성을 띠고 이어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유사성은 바로 뒤에서 다루는 연기법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양자는 서로 유사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점도 발견된다. 존 듀이의 경험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세속적인 특성을 띠고 전개하는 것인데 반하여, 사과수행은 세속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욕탐을 끊고 아라한에 이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다. 또한 사과수행에서는 탐 · 진 · 치 삼독을 완전히 끊으면 연속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존 듀이의 경험의 지속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이론은 자아의 성장과 발달에 중점을 둔 개념이지만,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은 5온에 집착하지 않는 무아에 중점을 두고 아라한과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사과의 수행과정을 봐도 이러한 점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양자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 차이점은 양자가 지평적으로 만나기 어렵게 할 개연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유사성이 있기에 논의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앞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존 듀이가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는 주체와 대상 간의 이루어지는 교육적 경험의 인식작용을 사과 수행에서는 연기법의 논리에 의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논의의 가능성은 크며, 이러한 점은 사과수행의 교육적 경험론의 기반이 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연기법(緣起法)의 전개과정과 논리를 살펴봄으로써 연기법이 어떻게 사과수행에서 교육이론의 기반이 될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기법(緣起法)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을 열두 가지 형태로 표현한다. 하나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老) · 병(病) · 사(死) · 우(優) · 비(悲) · 뇌(惱) · 고(苦) 의 유전문(流轉門)으로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을 인연[緣]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행(行)을 인연[緣]으로 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識)을 인연[緣]으로 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名色)을 인연[緣]으로 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인연[緣]으로 하여 촉(觸)이 있으며, 촉(觸)을 인연[緣]으로 하여 수(受)가 있고, 수(受)를 인연[緣]으로 하여 애(愛)가 있으며, 애(愛)를 인연[緣]으로 하여 취(取)가 있고, 취(取)를 인연[緣]으로 하여 유(有)가 있으며, 유(有)를 인연[緣]으로 하여 생(生)이 있고, 생(生)을 인연[緣]으로 하여 노(老) · 병(病) · 사(死) · 우(優) · 비(悲) · 뇌(惱) · 고(苦)가 있게 된다.51

다른 하나로서는 환멸문(還滅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무명(無明)이 멸(滅)하여 행(行)이 멸(滅)하고, 행(行)이 멸(滅)하여 식(識)이 멸(滅)하고, 식(識)이 멸(滅)하여 명색(名色)이 멸(滅)하며, 명색(名色)이 멸(滅)하여 육입(六入)이 멸(滅)하고, 육입(六入)이 멸(滅)하여 촉(觸)이 멸(滅)하며, 촉(觸)이 멸(滅)하여 수(受)가 멸(滅)하고, 수(受)가 멸(滅)하여 애(愛)가 멸(滅)하며, 애(愛)가 멸(滅)하여 취(取)가 멸(滅)하고, 취(取)가 멸(滅)하여 유(有)가 멸(滅)하며, 유(有)가 멸(滅)하여 생(生)이 멸(滅)하고,, 생(生)이 멸(滅)하여 노(老) · 병(病) · 사(死) · 우(優) · 비(悲) · 뇌(惱) · 고(苦)가 멸(滅)하게 된다.52

붓다는 이러한 열두 가지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인연(因緣)에 의해 일어나고 인연(因緣)에 의해 생기는 법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인연(因緣)이 일어나고 인연(因緣)이 일어나 생기는 법을 설명한다.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만약 이것이 생긴 즉 저것이 생긴다. 만약 이것이 멸(滅)하면 저것이 멸(滅)한다.53

붓다는 이상과 같이 인연에 의해 열두 가지 과정으로 나타나는 연기법을 총체적인 인간의 경험의 범위로 보고 있다. 즉 붓다는 이 열두 가지 범위를 벗어나는 영원한 자아(a permanent self)나 불변의 대상(an immutable object)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54그러므로 유전문의 경험을 하는 것도, 환멸문의 경험을 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 경험하는 범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과의 수행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다원 이전은 유전문의 길을 감으로써 범부중생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고, 수다원 이후는 환멸문을 지향하는 성자(聖者)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유전문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범부중생의 삶을 살게 되므로 퇴보의 삶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전문(流轉門)은 수다원 이전을 보면 눈을 비롯하여 몸에 이르기 까지 다섯 가지 감각기관[주관]이 색을 비롯하여 촉감에 이르기 까지 다섯 가지 대상[객관]과의 관계속에서 식(識)의 분별[인식작용에 해당한다]에 의해 마음에 욕탐이 있게 됨55으로써 5온이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유신견을 비롯한 열 가지 족쇄를 끊지 못하여 열반을 지향하는 성장과 발달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범부 중생(衆生)의 삶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환멸문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성자로서 열반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성장의 삶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환멸문(還滅門)은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과정을 보면 주관과 객관과의 작용에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식의 분별이 없게 되어 욕탐을 끊고, 이어서 세 가지 족쇄를 끊음으로써 범부 중생(衆生)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성자의 반열에 오르고, 점차적으로 열 가지 족쇄를 끊고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과 발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우리는 수다원과에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사과(四果)의 수행과정이 퇴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유전문(流轉門)보다 성장과 발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환멸문(還滅門)을 지향(志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사과(四果)의 수행과정에서 교육적 경험이 지속적으로 성장과 발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문과 환멸문은 각각 식(識)의 분별과 분별없음에 의한 인식론적 관계로서 퇴보의 길인 윤회와 성장의 길인 열반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이론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존 듀이의 경험론이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는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왕양명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의한 ‘심외무물(心外無物)’이 대안이 된다는 주장56이 있으나 대상인 사물과 격(格)하기는 하지만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사이의 인식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과의 수행과정에 나타난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작용은 존 듀이의 경험론의 인식론적 결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Ⅳ. 사과(四果)의 인간형성과정 고찰과 그 교육적 의의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출가 수행자가 연기법의 환멸문을 지향하여 욕탐을 끊고 세 가지 족쇄를 버리게 되며, 이로써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은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론에서는 찾기 힘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론은 분명히 한계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달리 표현하면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론에서 찾지 못한 점이 사과의 수행과정에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과의 수행과정은 교육적 논의가 가능하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사과수행의 인간형성의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사과수행의 인간형성과정이 갖는 우수성을 밝히며, 이에 교육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규명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형성’을 ‘선법취(善法聚)’와 ‘불선법취(不善法聚)’의 길로서 구분하고 있다. 즉 ‘선법취’로는 사념처의 법을, ‘불선법취’로는 ‘오개(五蓋)’를 각각 예로 들면서 전자는 ‘순수함으로 꽉 차서 깨끗한’ 특성을 띠고 있고, 후자는 ‘순전히 일탈함으로 꽉 차 있는’ 특성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57 『잡아함경』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법취’는 ‘순수함으로 꽉 차서 깨끗한’ 법의 특성에 나타나 있듯이 수행자가 사념처를 수행해서 매우 순수하고 청정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다. 반면에 ‘불선법취’는 ‘순전히 일탈함으로 꽉 차 있는’ 법의 특성에 걸맞게 인간형성이 탐욕과 성냄과 혼침, 그리고 들떠있거나 의심하는 등의 일탈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장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불선법취법(不善法聚法)’에 속하는 오개는 마음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오개는 마음의 다섯 가지의 장애(障碍) 번뇌로서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장애가 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게58 하기 때문이다.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에서는 불선법취에 대해 “욕계(欲界) 중생(衆生)이 누누히 번뇌로 인한 행동을 할 때 허물이 미세한 것이라도 깨닫지 못하므로 불선(不善)이라고 한다”.59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선법취’의 오개는 욕계와 관련이 있으므로,60 끊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데, 장아함경에서는 “오개를 끊지 못하면 사념처를 닦지 못하고, 칠각의 또한 닦지 못한다.”61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以上 오개에 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사과의 수행자가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疑) 등 세 가지 족쇄와 탐욕과 성냄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불선법취의 인간형성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 상태는 불선법취를 경험의 특성으로 하는 질성(質性)62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서론의 각주2에 나타나 있듯이, 이 질성은 개개인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여기에서는 불선법취의 체험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에 선법취의 상태는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疑) 등 세 가지 족쇄와 탐욕과 성냄을 끊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므로 수행자가 선법취의 인간형성을 성취했다고 표현하거나 선법취의 특성이 있는 질성을 지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과수행의 각 계위에서의 인간형성의 상태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해를 돕기 위해 수다원과 이전의 범부 중생과 수다원과 이후의 성자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왜냐하면 범부 중생과 성자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서 사과수행의 각 계위가 나타내는 인간형성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다원과 이전은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疑) 등 세 가지 족쇄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서, 무명의 촉(觸)[無明觸]에서 있게 되는 욕탐63을 끊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5취온, 즉 색(色, 형상) · 수(受, 감각) · 상(想, 생각 또는 표상) · 행(行, 의지와 행동) · 식(識, 의식분별)에 집착함으로서 교육적 경험이 성장하지 못한 경우이다. 즉 아직 범부 중생에 머물러 있는 질성으로 표현되는 미성숙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범부 중생으로서의 미성숙 상태를 교육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을 상대로 분별심이 발생하면, 욕탐에 의해 무엇인가를 취하여 만족하려고 하는데, 이로써 식(識)이 증장(增長)하고, 식이 증장함으로 5취온에 집착하여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64 인간형성의 상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수다원과는 범부 중생에서 성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교육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끊기 힘든 견해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성자가 됨으로써 인간형성의 질성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다원과는 비록 범부 중생에서 벗어나 성자가 되었지만 유신견, 계금취견, 의(疑), 탐욕, 성냄 등 다섯 가지 번뇌 가운데 유신견, 계금취견, 의(疑) 등 세 가지 번뇌만을 끊은 상태이므로 만족할만하게 질성적 변화가 이루어진 인간형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다함과는 수다원과와 마찬가지로 성자이지만, 아직 탐욕과 성냄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상에서 볼 때, 수다원과와 사다함과는 아직 탐욕심(貪欲心)과 성냄에 의해 지배를 받는 욕계(欲界) 중생(衆生)의 질성적(質性的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나함과는 수다원과 · 사다함과와 마찬가지로 성자위(聖者位)로서 욕계의 유신견, 계금취견, 의(疑), 탐욕, 성냄 등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結]를 모두 끊었지만, 색탐(色貪: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고자 하는 탐욕)이나 무색탐(無色貪: 무색계의 하늘에 태어나고자 하는 탐욕)이 남아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욕계를 벗어나 색계 이상의 하늘나라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65

그리고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색탐(色貪)과 무색탐(無色貪), 만(慢)과 도거(掉擧), 그리고 무명(無明) 등 다섯 가지 번뇌, 즉 오상분결(五上分結)을 끊음으로써 탐욕[貪]·성냄[瞋恚]·어리석음[癡]이 영원히 다함으로써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한 질성으로 표현되는 최상의 인간형성을 이룬 상태를 나타낸다.

지금까지 수다원과 이전 범부 중생의 삶의 모습과, 수다원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까지의 성자로서의 삶의 모습 등 인간형성의 과정을 살펴봤다. 이와 같은 사과의 인간형성의 과정은 세 가지 족쇄 등 열 가지 번뇌를 점차적으로 끊어가는 모습이므로 인식론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번뇌를 끊어 열반에 이르는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식(識)의 전변(轉變)에 의한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작용이 유신견, 계금취견, 의(疑), 탐욕, 성냄 등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結]와 색탐(色貪)과 무색탐(無色貪), 만(慢)과 도거(掉擧), 그리고 무명(無明) 등 다섯 가지 번뇌, 즉 오상분결(五上分結)을 점차적으로 끊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과정을 통해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존 듀이의 경험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以上에서 살펴본 사과의 수행계위가 나타내고 있는 인간형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부터는 수다원과에서 최종 단계인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인간형성의 과정이 어떤 논리로 전개하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논했듯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 즉 사회적 환경과 자연환경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경험을 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교육적 경험을 하며 성장을 한다. 그러므로 교육적 경험의 성장을 위해서는 지속성이 관건이 됨을 알 수 있고, 교육적 경험이 성장을 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잣대는 지속적인 성장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속적인 성장이 교육적 경험의 성장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것과 같이, 사과의 수행과정에서도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심 등 세 가지 족쇄를 끊고 지속적으로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나아갔는지 여부가 수행을 통한 인간형성의 과정에서 교육적 경험이 성장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66

그런데 이와 같은 사과수행에서의 교육적 경험의 지속성은 연기법에서 말하는 인연에 의한 연생법(緣生法)의 개념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유전문에서는 무명을 인연으로 할 때 행이, 행을 인연으로 할 때 식이, 식을 인연으로 할 때 명색이, 명색을 인연으로 할 때 육입이, … 유를 인연으로 할 때 생이, 생을 인연으로 할 때 노‧병‧ 사‧우‧비‧뇌‧고가 있게 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고, 한편, 환멸문에서는 무명이 멸하여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여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여 명색이 멸하며, 명색이 멸하여 육입이 멸하고, … 유가 멸하여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여 노‧병‧ 사‧우‧비‧뇌‧고가 멸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以上에서 유전문과 환멸문이 각각 나타내고 있는 열두 가지 지(支)는 앞의 지가 인연이 되어[pațcca,67 緣하여] 뒤의 지가 생기는 연생법(緣生法: pațiccasamuppanna-dhamma,68 緣已生法이라고도 함)의 관계이다. 平川彰은 이와 같이 ‘연하여 일어나는 연기’와 ‘연하여 생기는 법[연생법]’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상응부 경전의 인연상응(因緣相應)의 내용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생(生)을 연(緣)으로 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 비구들이여, 유(有)를 연으로 하여 생이 있다. 비구들이여 취(取)를 연으로 하여 유가 있다. … 비구들이여 무명을 연으로 하여 행(行)이 있다.69 그는 이와 같은 십이연기의 각 지 사이의 관계를 앞의 지는 연이 되는 힘으로서 연이 되어 나타나는 법[所緣法]인 뒤의 지를 생기게 하는데, 이것이 연기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70 그러므로 사과수행에서 수다원 이전은 연생법의 관계로 나타나는 유전문에서의 범부중생의 과정이며, 반면에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과정은 연생법의 관계로 나타나는 환멸문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생법의 개념에서 볼 때, 수다원과 보다 후속적으로 교육적 경험이 성장 · 발달의 단계에 있는 과위는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의(疑)[세 가지 족쇄]를 끊고 탐욕[貪]·성냄[恚]·어리석음[癡]이 엷어진 상태에 이른 사다함과이다. 이 수행 과위는 전 단계인 수다원과의 교육적 경험이 연이 되어 연생함으로써 성립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후속적인 경험의 단계인 아나함과는 유신견, 계금취견, 의(疑), 탐욕, 성냄 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함을 말하는데, 이것 또한 수다원과·사다함과의 수행과정을 통해 축적된 교육적 경험이 연이 되어 연생함으로써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후속적인 경험의 단계는 아라한과로서 탐욕[貪]·성냄[恚]· 어리석음[癡]이 영원히 다하게 되어 일체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말한다. 이 단계도 마찬가지로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의 수행과정을 통해 축적된 교육적 경험이 연이 되어 연생함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의 수행단계에서 얻게 된 경험이 연이 되어 후속적으로 이어지는 수행경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아라한이라고 하는 최상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라한의 교육적 경험과 관련하여 눈여겨 볼 것이 있다. 그것은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이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쪽에 중점을 두고 있는 개념이라면 아라한이 형성한 교육적 경험은 더 이상 성장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형성의 최상의 상태인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교육적 경험의 성장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양자의 교육적 경험의 지속적 성장의 범위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양교육학에서는 이성(reason)과 경험(experience), 물질(matter)과 마음(mind)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불교처럼 수행과정을 통해 탐욕[貪] ·성냄[嗔]·어리석음[痴]의 오염된 마음을 멸진(滅盡)하여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는 최상의 이상적 인간으로 완성되는 인간형성을 논하고 있지도 않고, 이와 같은 인간형성론도 없다. 그런 점에서 사과(四果)의 수행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킴으로서 궁극적인 목적인 아라한을 향해 성장 · 발달해 가는 모습은 불교만이 갖는 독특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양교육의 인간형성이론의 본보기로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Ⅴ. 결어

논자는 지금까지 사과(四果)의 인간형성과정에 대해서 존 듀이의 교육적 경험의 개념에서 중요시하는 지속성(continuity)과 상호작용(interaction), 성장(growth)의 원리와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존 듀이의 경험이 세속적인 특성을 띠고 전개하는 것인 데 반하여, 사과의 수행과정은 세속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욕탐을 끊고 아라한에 이르는 츨세간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다. 또한 사과수행에서는 아라한에 이르러 탐 · 진 · 치 삼독을 완전히 끊음으로써 연속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지속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존 듀이의 경험은 자아의 성장과 발달에 중점을 둔 개념이지만,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겪게 되는 경험은 무아에 중점을 두고 아라한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장과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다르다.

이상은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이고, 유사점으로는 ‘삶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 경험의 개념’은 ‘형이상학적 경험에 토대를 두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생각이나 의식의 흐름이 경험이라는 견해’ 사이에 나타나고, 또한 ‘상호작용의 논리’는 ‘연기적 전개의 논리’ 사이에서, 그리고 ‘지속성’ · 성장’의 개념은 ‘연속성[연생법]’ · ‘환멸문의 열반을 지향하는 성장 또는 계발(bhāvanā)’의 개념 사이에서 유사점이 발견된다.

이와 같이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유사점이 있어서 논의가 가능하며, 더욱이 연기법에는 존 듀이의 경험론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는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론적 작용이 나타나고 있어서 교육이론의 기반이 되고 있다.

본론의 사과의 인간형성 과정에서는 이와 같이 양자 사이의 유사점과 인식론에 기반을 둔 교육이론이 나타난다. 즉 욕탐에 의해 5온에 집착을 함으로써 유신견 등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한 상태의 범부위에 있다가 이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성자위인 수다원에 이르게 되고, 나머지 족쇄를 끊음으로써 보다 나은 교육적 경험의 상태인 사다함, 아나함의 계위를 거쳐 최상의 교육적 경험의 상태인 아라한에 이르게 되는데, 지속성과 성장의 양태를 띤 환멸문 지향의 인간형성의 과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인식 주관과 대상 사이에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작용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점은 존 듀이의 경험론이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는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된다.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왕양명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의한 ‘심외무물(心外無物)’이 존 듀이의 경험론의 인식론적 결여에 대안이 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격물치지의 과정에는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사이에 전개되는 인식과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과의 수행과정에 나타난 인식론적 관계와 인식작용은 존 듀이의 경험론의 인식론적 결여에 하나의 대안이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사과의 수행과정에서의 인간형성의 과정은 학교교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음의 번뇌를 소멸시킴으로써 최상의 인격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사과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형성의 과정은 학교교육을 통해 이루지 못하는 바람직한 인간형성이라고 하는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찾는 데 있어서 대안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사과의 수행과정은 교육적 경험의 개념과 이론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교육에서 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넘어 최상의 인간형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이 될 수 있다. 이에 사과(四果) 수행은 초기불교의 인간형성이론으로서 교육사상의 범위를 넓히며, 바람직한 인간 형성의 방법을 탐색하는 우리나라 교육에 사상적 ·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므로 사과(四果)의 수행과정이 갖는 교육적 함의는 분명히 있다고 하겠다.

요약

불교의 교육개념과 교육이론은 존 듀이의 교육개념이나 교육이론과 서로 많이 다르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배경 뿐만 아니라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라는 특성의 측면에서 둘 사이에는 공통점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존 듀이는 삶의 현실을 중시하고 이러한 삶의 현실이 경험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한 양자는 상의(相依)에 의한연속성[緣生法]과 성장(bhāvanā)의 개념과 상호작용과 지속성, 그리고 성장의 개념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기에 논의가 가능하다. 더욱이 존 듀이의 경험이론이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는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과정을 불교는 연기법에서 다루고 있어서 양자 사이에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은 사과수행의 인간형성을 위한 기반이론이 되는 가치가 있다. 이와 같이 양자는 논의가 가능하고 연기법은 기반이론이 되는 가치가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연기법의 개념을 방법론으로 하여 초기불교의 네 가지 단계의 수행과정, 즉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 등 사과(四果)의 수행을 통해 범부 중생으로부터 세 가지 족쇄를 소멸하여 수다원의 성자의 과위에 이르고, 나아가 나머지 족쇄를 소멸하여 사다함과 아나함에 이르게 되며, 최종적으로 아라한 과위에서 탐 · 진 · 치 삼독심이 없어져서 열반에 이르는 환멸문 지향의 인간형성과정을 밝혔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열반이라고 하는 최상의 인간형성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교육적 경험의 성장과 지속성, 그리고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도 밝혔다. 이와 같이 사과의 수행과정은 교육적 경험의 개념과 이론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열반이라고 하는 최상의 인간형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이 될 수 있다. 또한 불교의 교육이론 중 사과(四果) 수행은 교육사상의 범위를 넓히며, 바람직한 인간 형성의 방법을 탐색하는 우리나라 교육에 사상적 ·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주제어

사과, 환멸문, 연기법, 연속성, 인간형성 , 교육적 경험, 지속성, 상호작용, 성장

Endnote

1 『增壹阿含經』 卷第十二』(『大正藏』2, p.0607a12.), “復有何因緣,如來弟子漏盡阿羅漢世人所應供養乎?比丘當知,漏盡阿羅漢以度生死源,更不復受有,以得無上法‥使漏盡阿羅漢世人所應供養.”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번뇌가 다한 붓다의 제자 아라한은 세상 사람의 공양을 받는다고 설한다. 나고 죽는 근원을 벗어났고,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며, 위가 없는 뛰어난 법을 얻었고,‥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세상 사람의 공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최상의 인간형성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2 질(質)은 수량으로 잴 수 있는 일반화된 경험이 아니라 개개인의 체험을 의미하는 경험을 가리킨다. 그리고 체험은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직접적인 경험’을 특성으로 갖고 있다. 고진호,「敎育經驗의 質에 관한 現象學的 考察」(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6쪽. 그러므로 개개인이 직접 체험한 경험의 수준을 질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듀이는 그의 저서 『Art as Experience』에서 이 질을 다른 어떤 경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각각의 경험이 갖는 고유하고 개성이 뚜렷한 질성(its own individualizing quality)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John Dewey, The Later Works, 1925-1953 Volume 10:(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34), p. 42.

3 존 듀이가 그의 경험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호작용에 대해 ‘듣는 것’과 ‘말하는 것’과의 관계, ‘읽는 것’과 ‘쓰는 것’과의 관계, ‘파는 것과 ‘구입하는 것’과의 관계, ‘수요’와 ‘공급’과의 관계 등 연속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인식론적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박천환, 「듀이의 교변작용에 대한 교육인식론적 해석」『초등교육연구』Vol.4(서울: 한국초등교육연구회, 2010), 66-67쪽. 박천환은 존 듀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교육인식론적 과정에 대해 대학의 격물치지론에 근거하여 논하고 있다.

4 불교의 수행에서 교육이론을 찾고 규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불교의 교학에서 교육이론을 찾아야지, 수행에서 교육이론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라는 시각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수행과 교학이 둘로 명확히 구분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교학의 이론은 실제 수행과정에서 검증이 되기도 하고,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는 교학의 이론으로 성립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불교의 수행에서 교육적 이론을 도출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하겠다. 마찬가지로 사과의 수행과정에서도 교육이론을 도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5 이필원,「阿羅漢の硏究」(佛敎大學 博士學位論文, 2007), p.87. 四向과 四果의 동시성립의 문제, 四果는 각각 별도로 기원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 四果說은 누가 설했는가의 문제의 세 가지 견해가 있다.

6 『雜阿含經』卷 第二十九(『大正藏』2, p.205中.), “何等為沙門果.謂須陀洹果. 斯陀含果. 阿那含果.阿羅漢果. 何等為須陀洹果. 謂三結斷. 何等為斯陀含果. 謂三結斷. 貪恚癡薄. 何等為阿那含果.謂五下分結盡. 何等為阿羅漢果. 謂貪恚癡永盡.一切煩惱永盡.”

7 『雜阿含經』 卷 第四十一(『大正藏』2, p.298下), “爾時. 世尊告諸比丘. 有四沙門果. 何等為四. 謂須陀洹果. 斯陀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 何等 為須陀洹果. 謂三結斷. 是名須陀洹果. 何等為斯陀含果. 謂三結斷. 貪 恚 癡 薄. 是名斯陀含果. 何等為阿那含果. 謂五下分結斷. 是名阿那含果. 何等為阿羅漢果. 若彼貪欲永盡. 瞋恚永盡. 愚癡永盡. 一切煩惱永盡. 是名阿羅漢果.”

8 T.W. Rhys Davids,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86), p.725.

9 서현희, 「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 『인도철학』33(서울 : 인도철학회, 2011), 209쪽.

10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울산: 초기불교연구원, 2010), 474쪽.

11 같은 책.

12 T.W. Rhys Davids, op. cit., p.660.

13 열 가지 족쇄 가운데 낮은 단계의 족쇄가 세 가지 족쇄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족쇄경’에서는 유신견, 의심,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 감각적 욕망, 악의(惡意)를 낮은 단계[下分結]이라고도 한다. 각묵스님, 앞의 책, 313쪽.

14 T.W. Rhys Davids, op. cit., p.31.

15 『中阿含晡利多品 五下分結經』第四(『大正藏』1, p.778下.), “尊者鬘童子答曰. 世尊曾說初下分結. 是我受持. 欲. 恚. 身見. 戒取. 疑. 世尊說第五下分結. 是我受持.” 탐욕, 성냄, 내가 있다는 견해, 계에 대한 집착, 의심을 말한다.

16 T.W. Rhys Davids, op. cit., p.77.

17 서현희, 앞의 글, 204쪽.

18 『雜阿含經』卷第二十四(『大正藏』2, p.173中.), "爾時. 世尊告諸比丘. 於四念處多修習. 當得四果. 四種福利. 云何為四. 謂須陀洹果, 斯陀含果, 阿那含果, 阿羅漢果."

19 『雜阿含經』卷第二十六(『大正藏』2, p.182.), "爾時. 世尊告諸比丘. 有五根. 何等為五. 謂信根. 精進根. 念根. 定根. 慧根. 若比丘於此五根如實善觀察. 如實善觀察者. 於三結斷知 .謂身見. 戒取. 疑. 是名須陀洹."

20 『雜阿毘曇心論』 卷第五 賢聖品 第五(『大正藏』1552, p.0908b.24.), “何故說四念處耶?答:四倒四念四識住及陰,以四種修所治故,說四種隨修法. 彼治不淨淨想顛倒故說身念處,治苦樂想顛倒故說受念處,治無常常想顛倒故說心念處,治無我我想顛倒故說法念處.” 대치(對治)는 불교용어이다. 병을 잘 알고 치료하는 것이 대치이다. 붓다는 잡아함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雜阿含經』 卷第十五(『大正藏』2, 0105a25.), “爾時, 世尊告諸比丘:「有四法成就,名曰大醫王者,所應王之具, 王之分. 何等為四?一者善知病, 二者善知病源, 三者善知病對治, 四者善知治病已, 當來更不動發.」” 또한 붓다는 중생이 겪는 생 · 노 병 · 사 등의 고통을 잘 아는 大醫王으로서 이것들을 잘 치유한다고 같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 諸比丘! 彼世間良醫於生根本對治不如實知, 老, 病, 死, 憂, 悲, 惱, 苦根本對治不如實知, 如來, 應, 等正覺為大醫王, 於生根本知對治如實知, 於老, 病, 死, 憂, 悲, 惱, 苦根本對治. 如實知, 是故如來, 應, 等正覺名大醫王.”

21 『中阿含經』卷第二十四(『大正藏』1, p.0583b04.) “復次, 比丘觀身如身, 比丘者, 此身隨住, 隨其好惡, 從頭至足, 觀見種種不淨充滿. …”

22 T.W. Rhys Davids, op. cit., p.656. 족쇄는 빨리어로 삼요자나(saṁyojana)로 saṃ(함께)+√yuj(to yok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함께 멍에를 지다(yoke), 묶는다(bond)’는 의미에서 ‘족쇄(fetter)’라고 번역한 것이다. 족쇄는 중생을 윤회하도록 하는 정신적인 요인을 말한다.

23 대림스님‧각묵스님 공동번역 및 주해(2010). 『아비담마길라잡이 (하)』(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0), 598-600쪽.

24 서현희, 앞의 글, 207쪽.

25 『阿毘達磨俱舍論』卷第二十一(『大正藏』29, p.0108c29.), “謂邊執見隨身見轉. 見取隨戒取轉, 邪見隨疑轉.” 변집견(邊執見)은 편벽되어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의미하며, 견취(見取)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

26 『雜阿含經』卷第一(『大正藏』2. 0001a17, 0001a20.), “爾時, 世尊告諸比丘:「於色當正思惟, 色無常如實知. 所以者何? 比丘! 於色正思惟, 觀色無常如實知者, 於色欲貪斷;欲貪斷者, 說心解脫,「如是受, 想, 行, 識當正思惟, 觀識無常如實知, 所以者何? 於識正思惟, 觀識無常者, 則於識欲貪斷;欲貪斷者, 說心解脫.” 이상 잡아함경에서는 “색(色)이 영원하지 않음을 여실히 아는 자는 색에 대한 욕탐을 끊게 되고, 욕탐을 끊는 것은 심해탈이다. 이와 같이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수(受), 상(想), 행(行)에 대한 설명이 없이 “식(識)이 영원하지 않음을 실답게 알아야 하는 까닭은 식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는 자는 식에 대한 욕탐을 끊게 되고, 욕탐을 끊는 것은 심해탈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논자가 보기에 인용한 잡아함경에서 수(受), 상(想), 행(行)이 영원하지 않음을 실답게 아는 자는 욕탐을 끊게 되고 욕탐을 끊음으로써 심해탈이 된다는 내용이 생략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점은 심해탈에 대해 원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충이 될 수 있다. 원전『앙굿따라니까야 빠릿찻따까경(AN7.69-pāricchattakasuttaṃ)』에 보면 “āsavānaṃ khayā anā savaṃ cetovimuttiṃ”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번뇌가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5온의 번뇌가 모두 없는 것이 심해탈의 의미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7 이중표, 『불교수행의 바른길 –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서울: 불광출판사, 2020), 239쪽.

28 John Dewey, Experience and Nature(Chicago Lond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26), p.4a.

29 김무길, 『존 듀이의 교호작용과 교육론』(서울: 원미사, 2005), 37쪽.

30 정덕희, 『존 듀이의 교육철학』(서울: 문음사, 2005), 103쪽.

31 김준섭, 「존 듀이의 경험과 지성과 자유의 철학」『철학논구』2(서울: 서울대학교 철학과 간행물, 1973), 5-13쪽.

32 김동식, 『듀이 – 경험과 자연』(울산: 울산대학교출판부, 2005), 231쪽.

33 데이비드 E. 덴튼 엮음, 김병옥 옮김, 『교육에 있어서의 실존주의와 현상학』, 미출간물. 17쪽.

34 정덕희, 앞의 책, 87쪽.

35 John Dewey, Experience and Nature, op.cit., p.133.

36 김준섭, 앞의 글, 6쪽.

37 John Dewey, Experience and Education, The Later Works, 1925-1953, Volume 13: 1938-1939(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8), p.43.

38 송도선, 「존 듀이의 경험의 구조」. 『교육철학』20(서울: 교육철학연구회, 1998), 182쪽.

39 John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2004), p.134.

40 존 듀이 지음 · 박철홍 번역, 『경험으로서 예술』(서울 : 나남출판사, 2016), 111쪽.

41 John Dewey, op.cit., p.22.

42 김무길, 『존 듀이의 교호작용과 교육론』(서울: 원미사, 2005), 51쪽.

43 위의 책, 55쪽.

44 John Dewey, The Later Works, Volume 16: 1949-1952, Knowing and Known(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91), p.126.

45 김무길, 앞의 책, 55-56쪽.

46 송도선, 앞의 글, 189쪽.

47 John Dewey, Experience and Education, op.cit., p.19.

48 John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 op.cit., p.74.

49 Ibid. p.10.

50 David J. Kalupahana, 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87), p.23-24.

51 『中阿含經』 卷第二十一(『大正藏』1, p.562下.), “緣無明行, 緣行識, 緣識名色, 緣名色六處, 緣六處更樂, 更樂覺, 緣覺愛, 緣愛受, 緣受有, 緣有生.緣生老死.”

52 『中阿含經』 卷第二十一(『大正藏』1, p.562下.), “若無明滅則行滅, 行滅則識滅, 識滅則名色滅, 名色滅則六處滅, 六處滅則更樂滅, 更樂滅則覺滅, 覺滅則愛滅, 愛滅則受滅, 受滅則有滅, 有滅則生滅, 生滅則老死滅.”

53 『中阿含經』卷第二十一(『大正藏』1, p.562下.), “我本為汝說因緣起及因緣起所生法. 若有此則有彼. 若無此則無彼. 若生此則生彼. 若滅此則滅彼.”

54 David J. Kalupahana, op.cit., p.31.

55 『增壹阿含經』 卷第十二(『大正藏』2, 0605a02.), “欲有何味? 所謂五欲者是, 云何為五? 眼見色, 為起眼識, 甚愛敬念, 世人所喜. ‥ 身知細滑, 甚愛敬念, 世人所喜. ‥” 증일아함경에서는 “욕탐은 어떤 맛이 있는가? 이른바 다섯 가지 욕탐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는 눈이 색을 보면 눈의 알음알이가 생기는데 매우 사랑하고 즐거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 몸은 부드러움을 느끼면 매우 사랑하고 즐거워 한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 사이에 식의 분별이 있게 됨으로 인해 욕탐이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56 박천환, 앞의 글, pp.78-81.

57 『雜阿含經』 卷第二十四(『大正藏』2, p.171中25.), “爾時. 世尊告諸比丘, 有善法聚, 不善法聚. 云何善法聚. 所謂四念處. 是為正說. 所以者何. 純一滿淨聚者. 所謂四念處. 云何為四. 謂身身觀念處, 受, 心, 法法觀念處. 云何不善聚. 不善聚者. 所謂五蓋. 是為正說. 所以者何. 純一逸滿不善聚者. 所謂五蓋. 何等為五. 謂貪欲蓋, 瞋恚蓋, 睡眠蓋, 掉悔蓋, 疑蓋.”

58 『雜阿含經』 卷第二十九(『大正藏』2, p.0206a15.), “遠離五蓋煩惱於心, 令慧力羸, 為障礙分, 不趣涅槃.”

59 『阿毘曇毘婆沙論』 卷第二十六(『大正藏』28, p.195下.17.), “欲界眾生, 數數行此煩惱行時, 미세不각시과. 是故為於眾生. 說名不善.”

60 『阿毘達磨俱舍釋論 卷第十五』中分別惑品之二.(『大正藏』29, p.0263a19.), “欲界中五蓋. 釋曰. 於餘界不立五蓋故唯欲界中有五蓋.”

61 『佛說長阿含經』 卷第十二(『大正藏』1, p.0075a26.), “未滅五蓋, 於四念處不能精勤, 於七覺意不能勤修.” 칠각의는 일곱 가지 열반의 구성요소로서 이 일곱 가지 열반의 구성요소를 닦으면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열반, 열반으로 인도한다. 마음챙김의 열반의 구성요소, 법을 간택하는 열반의 구성요소, 정진(精進)의 열반의 구성요소, 희열(喜悅)의 열반의 구성요소, 고요함의 열반의 구성요소, 삼매의 열반의 구성요소, 평온의 열반의 구성요소가 일곱 가지 열반의 구성요소이다. 각묵스님 지음, 『초기불교이해』, (울산 : 초기불교연구원, 2010), p.63. p.349.

62 불선법취의 특징이 경험 전체를 특징지을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불선법취가 나타 내고 있는 경험의 특성을 질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63 『阿毘達磨俱舍論』 卷第九(『大正藏』29, p.0049b23.) “餘經言. 由無明觸所生諸受為緣生愛. 是故觸時非理作意與受俱轉無明為緣. 구사론 내용의 의미는”무명의 촉(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감각[受]이 연(緣)이 되어 애착[愛]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촉이 될 때 옳지 않은 의식이 감각인 수(受)와 함께 전개되는데 무명이 연(緣)이 된다."는 것으로서, 이 내용의 요점은 촉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욕탐에 의해 5취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명의 촉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64 이중표, 앞의 책, 221-222쪽.

65 이필원,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니까야를 중심으로」『불교학연구』 제54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18), 29쪽.

66 앞의 각주 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수행의 원어 ‘bhāvanā’가 성장 또는 계발의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면 교육적 경험이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아니라 수행을 했지만 퇴보하였다면 교육적 경험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과 수행과정에서의 지속적인 성장 여부가 교육적 경험의 성장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됨을 알 수 있다.

67 水野弘元, 『パ-リ語辭典』(東京: 春秋社, 2004), 191頁

68 loc.cit.,

69 平川彰, 『法と緣起』(東京: 春秋社, 1990), 310頁

70 Ibid, 311頁

References

1 각묵스님 지음,『초기불교이해』, 울산: 초기불교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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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무길,『존 듀이의 교호작용과 교육론』, 서울: 원미사, 2005.  

4 대림스님 · 각묵스님 공동번역 및 주해,『아비담마길라잡이 (상)』, 울산: 초기불전 연구원, 2010.  

5 대림스님 · 각묵스님 공동번역 및 주해,『아비담마길라잡이 (하)』, 울산: 초기불전 연구원, 2010.  

6 대림스님 옮김,『청정도론 제3권』,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09.  

7 데이비드 E. 덴튼 엮음 김병옥 옮김, 교육에 있어서의 실존주의와 현상학, 미출간 물.  

8 이중표,『불교수행의 바른길 –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서울: 불광출판사, 2020.  

9 존 듀이 지음 · 박철홍 번역,『경험으로서 예술』, 서울: 나남, 2016.  

10 정덕희,『존 듀이의 교육철학』, 서울: 문음사, 2005.  

11 David J. Kalupahana, The Principles of Buddhist Psychology,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87.  

12 John Dewey, Experience and Nature, Chicago Lond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26.  

13 John Dewey, Experience and Education, The Later Works, 1925-1953, Volume 13: 1938-1939,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8.  

14 John Dewey, The Later Works, Volume 16: 1949-1952,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91.  

15 John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2004.  

16 T.W. Rhys Davids,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 y』, 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86.  

17 水野弘元,『パ-リ語辭典』(東京: 春秋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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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진호,「敎育經驗의 質에 관한 現象學的 考察」.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서울: 동국대학교, 1993)  

20 김광민,「敎育理論으로서의 智訥의 佛敎 修行理論: 敎育認識論的 觀點」. 『서울대 학교 박사학위논문』(서울: 서울대학교, 1988)  

21 김준섭,「존 듀이의 경험과 지성과 자유의 철학」, 『철학논구』, 2(서울: 서울대학교 철학과 간행물, 1973)  

22 박천환,「듀이의 교변작용에 대한 교육인식론적 해석」『초등교육연구』Vol.4(서 울: 한국초등교육연구회, 2010)  

23 송도선,「존 듀이의 경험의 구조」, 『교육철학』, 20(서울: 교육철학회, 1998)  

24 서현희,「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 『인도철학』, (서울: 인도철학회, 2011)  

25 이필원,「阿羅漢の硏究」. 『博士學位論文』(京都: 佛敎大學, 2007)  

26 이필원,「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나는 깨달음의 다원적 양상-니까야를 중심으로」 『불교학연구』제54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18)  

27 『佛說長阿含經』卷 第十二 『大正藏』1  

28 『阿毘達磨俱舍論』卷 第九 『大正藏』29  

29 『阿毘達磨俱舍論』卷 第二十一 『大正藏』29  

30 『阿毘達磨俱舍釋論』卷 第十五 『大正藏』29  

31 『阿毘曇毘婆沙論』卷 第二十六 『大正藏』28  

32 『雜阿毘曇心論』卷 第五 賢聖品 第五『大正藏』1552  

33 『雜阿含經』卷 第一 『大正藏』2  

34 『雜阿含經』卷 第十五 『大正藏』2  

35 『雜阿含經』卷 第二十四 『大正藏』2  

36 『雜阿含經』卷 第二十六 『大正藏』2  

37 『雜阿含經』卷 第二十九 『大正藏』2  

38 『增壹阿含經』卷第十二『大正藏』2  

39 AN7.69. pāricchattakasuttaṃ